첫 번째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내 간절한 꿈은 미국에서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구체적인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난 그때 의사가 되고 싶다는 큰 소망이 있었고. 그리고 그때에는 한국에서가 아닌, 미국에서 의사가 되는 것이 중요했다. 대학교 1학년 때의 내 모습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난 경기도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서울에서 치열한 입시교육을 받고 있진 않았지만, 곧잘 공부도 했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별로 무얼 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실하진 않았다. 부모님 보시기엔, 아마 내 그런 모습이 조금 답답해 보였을 수도 있었겠지 싶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아님 무언가 바람이 들었나.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난 어찌어찌 조기유학의 바람을 등에 업고 미국 시골에 있는 기숙사 고등학교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 가족 모두를 한국에 뒤로 한채 그렇게 유학생활이 10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때 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막연하게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것 밖엔, 그리 구체적인 계획이 있진 않았다.
미국 고등학교 생활은 굉장히 다이내믹했다. 학교가 있는 지역이 시골인지라, 그 생활에 적응하고, 영어 배우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적응하느라고 바빴지만, 돌이켜보면 즐거운 학창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의사라는 직업이 내 머릿속에 큰 부분을 지배하진 않았던 듯 싶다. 그저 그냥 미국에서 대학을 가야 하겠지, 어떤 대학을 가야 하나 이런 생각정도였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여느 한국 유학생들 같이 좋은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에서 대학을 진학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미국 의과 대학 진학은 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미국에선 대부분의 의과대학이 학부 졸업 후 전문대학원 체제로 운영된다). 그 계기가 뭔지, 이유가 뭔지, 지금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왜?"라고 물었을 때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대답을 할 정도는 되었겠지 싶다. 지금 와서 스멀스멀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냥 생물과학 좋아하고, 의사라는 직업은 사회적 지위도 꽤 높고, 수입도 좋으니, 그리고 그것도 미국에서 의사가 되면 "멋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원동력이었던 같다. 그저 멋있어 보이고, 좋아 보이고, 남들이 좋다고 하니깐 그렇게 난 내 꿈을 설정해 버린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근데, 성격상 그렇게 내 꿈이 설정되고 나니, 난 그 길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대학생 시절 난 너무 힘들었다. 공부가 힘든 건 의대를 준비하는 모든 학생들 (pre-med)에겐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의사의 꿈"을 갖고 미국에서 대학생활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아직도 1학년 입학하자마자 의대입학 어드바이저 (pre-med advisor)를 만나는 날이 기억난다. 그분의 말씀이, 외국인으로서 미국 의대 진학은 거의 불가능하니 도전하지 말라는 말. 내가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아니기에, 미국에서 의대를 진학할 확률이 너무 낮다는 것이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서 의대를 가는 길을 알아보라는 조언을 주셨다. 사실 살면서, 노력과 상관없이 내 꿈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갓 20살 즈음의 어린 청년이었던 내 모습이.. 그리고 그때의 가슴철렁임이 아직도 난 생생하다.
물론 그래서 이 길을 더 파기 전에 다른 길도 둘러보아야 하나 고민도 했다. 로스쿨을 준비해야 하나 생각도 해보면서 로스쿨 입시 컨퍼런스 같은데도 기웃거려 보고, 남들이 다 가려고 하는 파이낸스나 컨설팅 길은 어떨까 고민해보기도 했다 (사실 그래서 경제학을 복수 전공하기도 했다). 근데 왜였을까, 난 계속 미국에서 의사가 되는 것만이 내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을 계속했다. 소명이라고 할만한 거창한 뜻은 없었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과연 내가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에 얽매이고 있었던 것인지, 아님 정말 의사가 되고 싶었는지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당시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이 날 지배했고 내 대학시절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래서 난 주변에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진 선배가 없을까 건너 건너 수소문도 해보았다. 그 당시는 인터넷상의 정보도 많지 않던 때여서 정보의 양이 적었다. 어찌 알게 된 몇몇 지인들의 경험담은 다 실패담이 전부였고, 그들의 조언은 주로 "나도 실패했으니 너도 실패할 거야, 하지만 그게 인생이야"라는 식의 걱정과 격려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걱정과 고민들이 내 하루하루 생각을 지배했다. 난 어떻게 될까. 결국에 실패할 꿈인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대학생활 내내 고민의 연속이었고,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고, 청춘의 꿈을 그려야 했을 시기에, 나는 내 꿈의 현실성에 대한 고민으로 점점 지쳐갔다. 내가 지금 이 공부를 잘하고, 이 시험을 잘 보고, 성적이 잘 나온다 한들, 내가 원하는 의사의 꿈에 보탬이 될 수 있을까? 옆에 있는 미국친구들과 으쌰으쌰 힘내면서 같이 공부하면서도, 내 마음 한편은 항상 아렸고 아팠다. 이러한 초조함으로 나는 항상 스스로에게 내 꿈에 대한 반문을 하면서 밤을 지새우며, 때론 혼자 눈물도 흘렸다. 전화너머 부모님께 원망을 쏟아내기도 일쑤였다. 마치 내 인생은 이미 틀어진 것 같았고,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나는 미국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과 싸우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사실 막상 내가 왜 의사가 되고 싶고, 어떤 의사가 되고 싶고,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구체적 모습을 그려보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나는 나의 노력들이 꿈에 다다르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만 시간을 하루하루 소비하고 지냈다. 그래서 그때의 내가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나는 위로를 해주고 싶다.
다 괜찮을 거라고.
너무 원망하지 말라고.
만약 그 당시에 내가 의사로서 미래의 모습을 좀 더 꿈꿔보고 그려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면, 지금 나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내가 스스로 설정했던 꿈으로 소모되는 대학생활이 아닌,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대학생활을 했다면 난 지금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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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봄.
나는 우연치 않게 어느 한 고등학생과 zoom으로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내 모교 대학 졸업생 volunteer, 그리고 그 학생은 우리 모교에 새로 합격한 외국인 고등학생이었다. 그는 아마 미국 내 여러 대학교들에 합격한 똑똑한 학생이었던 것 같고, 몇 주 이내에 합격한 대학교들 중에 진학할 학교 하나를 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선택지가 여럿인 학생들의 결정에 도움이 되고자, 내 모교 입학처에서 나와 그를 연결시켜 준 것이었다.
그 학생은 나의 20년 전과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아시아계 유학생이었으며, 미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의대를 진학하고 싶어 했다. 눈빛은 빛나 보였고, 꿈도 있어 보였지만, 무언가 조심스러운 그 말투의 떨림도 느껴졌다. 나는 담담히 그의 질문들을 답해주었고, 그의 꿈 얘기도 들어주었고, 내 커리어 이야기도 공유해 주었다. 그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렇게 그 학생과 대화는
20년 전 나의 끝없는 고민의 기억들을 새록새록 상기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