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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srkim Aug 04. 2023

폭설 속 가로수길에서 한 소개팅

그렇게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의 정체성으로 방황하던 의대 1학년 겨울방학, 난 또 한국에 잠시 나왔다. 내 마음은 어차피 한국에 있었고, 부모님과 친구들을 볼 겸, 그리고 마음에 휴식을 취할 겸 그렇게 한국에 다시 나왔다. 


그리고 그 짧은 겨울 방학, 난 지금 내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내가, 왜 그때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내를 소개팅으로 만났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난 그 사람을 처음 만나는 날, 한 40분 정도 지각했다. 나는 수원 부모님 집에 머무르고 있었고, 소개팅 장소는 그 당시 잘 나가던 가로수길로 정했었다. 버스를 타고 약속시간에 맞추어 서울로 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소개팅 당일, 너무 심한 폭설이 내린 나머지, 버스는 생각보다 꽤 많이 지연되었고, 결국은 약속 장소에 한 40분 정도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더 큰 실수는 내가 정한 약속장소가 좀 모호했다. 그저 동네 무슨 친구 만나듯이 "가로수길 입구 어딘가"에서 만나기로 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눈이 내리고, 내가 지각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미리 전화를 해서 약속 장소를 카페나 어디 안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텐데, 난 마음이 너무 급해서였는지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나 보다. 아마 잘 알아서 어디 들어가 있겠지 싶었기도 하고. 


그런데 난 아직도 그 사람을 만난 그 첫 순간이 선하다. 


그렇게 "핫"하던 가로수길인데, 정말 너무 많은 눈이 내려서, 그 대낮에 차 하나 보이지 않았고, 사람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길거리는 너무 조용했고, 소복소복 눈만 쌓이던 그 길. 발자국 소리 밖에 들리지 않던 그 거리. 그런데 그 사람은 우산 하나 쓰고, 정말 약속한 대로 가로수길 입구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정말 어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한테 화가 많이 났을까? 


이러한 걱정의 마음이 앞섰지만, 그 사람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고, 우리는 곧 따뜻한 곳을 찾아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따뜻한 곳에서 본 그 사람은 예쁘고 아름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꽤 이야기가 잘 통했고, 잘 웃었고, 생각도 비슷했고,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어차피 이 세상엔 잘 되는 사람도 있고, 

잘 안 되는 사람도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다 상대적인 거니까...

어릴 땐 노력하면 다 되는 거라고 믿어 왔는데,

이젠 내 앞에 놓인 삶이 혹시 그 실패하는 삶이 아닐까 걱정도 되고.."


정말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그녀를 앞에 두고, 나는 깊고 깊은 나의 약점과 두려움, 그리고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방금 만난 그 사람에겐. 그렇게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 후로 우리는 몇 번 더 만나게 되었다. 세 번째 데이트로 12월 31일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제야음악회를 함께 갔다. 하루 뒤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상황이었지만, 그저 그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행복했었다.  그 추운 겨울날, 음악회 마지막 행사로 야외에서 불꽃놀이를 했는데, 그 불꽃들은 정말 지금도 잊히지 않을 만큼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 순간만큼은 그동안 외국에서 혼자 생활하며 느꼈던 외로움 그리고 고독감이 사라지는 듯했다.  불꽃놀이를 보면서, 우리는 서로 새해에는 더 좋은 일만 많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해 주었고,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그날 밤 말도 안 되는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를 시작하던 그날의 제야 음악회와 불꽃놀이. 우리은행이 음악회를 후원했었는지 우리은행이 적힌 풍선이 정말 많았다.


사실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순탄치 않았다. 장거리 연애의 어려움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난 계속 정체성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내면의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어찌 보면 이젠 여자친구가 한국에 있었기에, 한국에 대한 애착이 좀 더 강해졌다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난 계속 정체성과 의대 공부 사이에서 힘들어했고,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수차례의 이별을 했고, 어쩌면 다신 이어지지 않을 것 같던 시간들도 꽤 길었다.  


********


2023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함께 잠들어 있는 딸아이와 아내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때 그 겨울, 아내와 소개팅 직후, 친한 대학교 후배가 나에게 물었다.


"형, 어제 만난 그분 어땠어요?" 

"그림의 떡이지"

"왜요?"

"너무 맘에 드는데, 잘 되지 않을 게 뻔하니까"


정말 사람 일은 알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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