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어느 새벽.
난 새벽 4시에 일어났다. 10월부턴 이제 외과 실습을 도는 거니까. 난 외과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으니까, 이번 로테이션에서는 좋은 점수와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난 4시에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후다닥 준비를 끝내고, 짧지만 차를 몰고 5분 거리 학교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종종걸음으로 캠퍼스 새벽공기를 가르며, 학교 병원 지하에 있는 의대생 라운지에 4시 반에 도착했다.
난 그 당시에 정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외과에도 여러 가지 분과들이 있긴 하지만, 의대 3학년으로서 외과 로테이션은 하나였다, 그 안에서 여러 분야의 외과 팀들에 로테이션 방식으로 합류하고 한 팀의 일원으로 라운딩도 돌고, 수술도 같이 들어가고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실습이었다. 다른 과에 비하면 체력적으로 부담이 될 수도 있는 로테이션였으나, 외과계열로 전공을 하고자 하는 학생이라면, 조금이라도 좀 더 경험을 얻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졸렵고 힘든 거 하나쯤은 거뜬히 이겨내야 하는 그런 로테이션이었다. 그리고 그 첫 단추로 난 대장항문외과 팀에 합류했었다. 종양외과보단 덜 빡세다는 과였지만, 그래도 몸은 다른 팀 못지않게 힘들다는 소문을 이미 들었던 상태였다.
어찌 됐건, 의대 3학년 실습생이었던 나는 그날 4시에 일어났고, 4시 반에 병원 지하실 라커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곤, 의대생 라운지에 있는 컴퓨터로 동기들과 예비 라운딩 (pre-rounding)을 시작했다. 정말 의사계의 구조가 군대 계급체계와 너무 비슷한 것이 여기에 있다. 아침 6시에 어텐딩들을 포함한 컨퍼런스가 있었기 때문에, 그 컨퍼런스 전에 환자를 다 보기 위해선 치프 레지던트가 5시 30분에 라운딩을 돌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되면 그 아래 있는 주니어 레지던트 그리고 그 보다 한 단계 더 아래 있는 인턴은 5시부터 각종 바이탈과 검사결과를 훑어보고 미리 정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인턴단계까지가 환자 케어에 있어서 핵심적인 인력이다. 의대생들은 optional 한 위치에서 인턴 아래에 위치하게 되는데, 결국 인턴보더 조금 더 일찍 준비를 해서 인턴보다 조금 더 일찍 환자 결과 보고를 하면, 좋은 의대생으로 평가를 받을 확률이 "조금" 올라간다. 그렇기 때문에 5시에 준비를 시작하는 인턴 보다 "조금 더" 먼저 컴퓨터에서 차트 정보를 훑어보고자, 난 4시에 일어나서 4시 30분에 이미 지하실에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곧 나와 동기들은 깨알 같은 글씨로 각종 환자정보를 적은 종이 한 장씩을 들고 플라스틱 바스켓에 드레싱 장비를 챙긴 뒤 병동으로 후다닥 올라간다. 병동에는, 우리 못지않게 비몽사몽으로 보이는 주니어 레지던트와 인턴이 온다. 그리고 곧 치프 레지던트가 등장하는데, 이 치프 레지던트는 마치 대낮 약속시간에 나온 사람처럼 말끔하다. 저 사람은 뭐가 다른데 이 시간에도 저렇게 말끔하게 생겼을까 싶다 (우리와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곤 꾸벅꾸벅 졸면서 컨퍼런스를 버틴 뒤, 그리고 그 후엔 이제 수술실로. 하루에 2-3개의 수술 케이스를 들어갔었는데, 정말 수술이 5-6시간 아님 10시간까지 지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번도, 의대생인 내가 쉬고 싶다고나 화장실을 가고 싶다거나 그럴 여지는 없다. 혹시나 수술 중 어텐딩이 작은 거 하나 물어볼까 조마조마하게 옆에서 어시스트하면서 수술에 집중하려고 한다. 매 순간 하나하나가 내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항상 긴장했고, 그 순간순간 배고픈지도 힘든지도 모른 채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그 3개월 정도의 외과 실습 로테이션, 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 새벽 4시 반에 출근하고도 티도 안 냈고 (티를 조금 냈어야 했나 싶기도...), 그 어떤 잡일도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volunteer 했고, 쉬는 짬이 나면 주머니에서 큰 포켓북 (사이즈는 포켓북인데 두께가 너무 두꺼웠다)으로 시험공부를 했다. 가끔씩 나는 휴식시간에도 친구들이랑 퀴즈 내는 게임을 하면서 모르는 것 더 공부하려고 열정을 내보기도 했다. 일거수일투족 내가 속한 팀의 인턴, 레지던트, 그리고 어텐딩들을 좇아다니며, 배우고 잘 보이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그 몇 주가 지나갔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항상 무언가 공허했다. 과연 나는 잘하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 정말 나는 정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은 것일까. 이번 시험은 어떻게 공부하지? 언제 시간 내서 공부하지, 이번엔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을까.
난 언제 행복해질까.
몸은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항상 머릿속은 고민들로 가득했다. 오늘은 뭘 먹을까의 가장 기본적인 고민부터, 인생 진로에 관한 방향성에 관한 고민까지. 정말 고민과 질문이 너무 많았다.
*******
그 후로부터 1년 뒤. 의대 4학년 초.
이제는 전공할 과를 정하고 해당 전공으로 레지던시에 지원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보통 미국 의대생들은 3학년 후반에 전공할 과를 정하고, 4학년 초반에는 주로 추천서를 받고 레지던시 애플리케이션을 마무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나는 외과의사로서의 길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난 내가 외과의사의 길을 원한다고 계속 생각해 왔지만, 4학년이 되고 나서야, 내 마음은 내과에 있을 때 좀 더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과 쪽 레지던트나 어텐딩들이 나랑 성향이 좀 더 비슷하다고도 느꼈고, 내과의사들의 문제해결 방식도 내가 사고하는 방향과 좀 더 비슷하다고 느꼈었던 것 같다. 4학년 초반에 전공을 바꾸기엔 시간이 조금 촉박했지만, 불가능할 것도 없었고,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보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었다. 맞지 않는 옷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었더라면...'이라는 후회감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고, 나에겐 최선의 시기와 길이라 생각했다.
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