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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철 Jan 01. 2022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리더란 무엇인가?

탐험 시대의 마지막 영웅이 어니스트 H. 섀클턴(Shackleton).


남극 원정에 남극 탐험의 최초는 노르웨이 안문센, 스콧은 남극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이런 소식을 들은 섀클턴은 스물일곱 명의 대원들과 함께 영국에서 인듀런스(Endurance)호를 타고 1814 8월에  번째 남극 탐험에 나선다.


어떠한 도전이 눈앞에 닥쳐왔을 때 그 대원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장이 있고, 모두를 어렵고 힘든 상황에 상관없이 선장 자신이 가진 생각으로만 항해를 하면서 전원을 침몰시킬 수도 있다. 섀클턴의 항해는 비록 배는 침몰해서 사라졌지만 선원 27명 모두 생존을 해서 그 조난 634일 동안 극복하고 살아 돌아온다. 이러한 선원 한 명 한 명을 선발할 때부터 꼼꼼하게 그들의 성격과 특성을 알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남극을 탐험하기 앞서 탐사대의 구인 문구는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많은 과학자들의 구인 문구로 활용하고 쉽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지금의 세태에 울림을 준다.


MEN WANTED          

for hazardous journey, small wages, bitter cold, long months of complete darkness, constant danger, safe return doubtful, honor and recognition in case of success.

– Ernest Shackleton 4 Burlington st.

위험한 여정, 적은 임금, 혹한, 몇 달간 지속되는 길고 완전한 어둠, 끊임없는 위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할 수 없음, 성공 시 영광과 명예를 얻을 수 있음 – 어니스트 새클턴, 벌링턴 街 4번지


 명이 지원했을까? 무려 5 명이 지원한다. 여기에서 섀클턴은 면접에서 노래를 부르게 시킨다. 압박면접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장의 명령에 따르는지 아닌지의 상황을 시험한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멘탈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면접에서 합격한 사람들은 장교, 예술가, 과학자, 의사  다양한 직업을 가진 27명이었다. 면접에서 떨어졌지만 몰래  밀항자가   있어서 27명에서 28명이 되었다.

 또한 그들이 팀원과  적응이  되고 불화가 일어날 , 혹은 힘들어하는 대원에게 모든 에너지와 소통의 시간을 투입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읽히고 회자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기록을 중요시 여겼던 섀클턴은 일기를 썼다.


또한 사진사인 프랭크 헐리의 생생한 사진이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진사가 장갑을 잊어버렸을 , 선장 자신이  앞에서 지휘하면서 장갑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장갑을 벗어 기꺼이 가장 중요한 기록자인 사진사에게 건네주었다.


이전에 섀클턴이 1907~09년 사이에 남극 탐사 때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대원에게 줬던 이야기도 있다. 그 비스킷이 2011년 영국 런던 크리스 경매에서 1250파운드(230만원)에 팔렸다. 비스킷은 영국의 헌틀리 앤드 파머스사가 제조한 고단백 에너지 대용식이다.

1909년 섀클턴은 남극점을 160㎞ 앞두고 기상악화 때문에 베이스캠프로 철수해야만 했다. 캠프로 돌아오는 과정은 추위와 굶주림과의 전쟁이었다. 어느 날 섀클턴은 배고파 지쳐 있는 대원 프랭크 와일드에게 자신은 아직 버틸 만하다며 자기 몫의 비스킷을 내줬다. 와일드는 그 비스킷을 먹지 않았다. 그는 일기에 “수천 파운드를 준다 해도 이 비스킷을 팔지 않겠다. 섀클턴의 희생정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적었던 것이었다.

항해를 시작해서 부빙 사이에 끼여서 꼼짝하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부빙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시기. 인듀어런스호는 길이가 44미터, 속도는 시속 18.9킬로를 내는 목조선박이었다. 90년이 지난 후에도 남극에는 겨울로 접어들 때는 배를 띄우지 않는다.

배가 얼음에 갇히면서 1915년 1월 20일부터 10월 27일까지 항해를 못하게 되자, 그들은 얼음 위에서 생활을 한다. 얼음 위 생활을 하면서 눈이 녹는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봄이 되면서 얼음이 녹으면서 배가 파손이 된다.

10 27 섀클턴은 대원들에게 "배를 포기한다"라는 명령을 내린다. 식량도 충분하지 않다. 그들이 이동을 하면서 개인에게 2파운드의 소지품만 허용한다는 말을 하면서 우선은 섀클턴 본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금으로  담배 케이스와 금화를   속으로 버리면서 자신이 제일 먼저 보여준다.

배를 버리고 최소의 소지품을 허용하는데 예외가 있었다. 기상학자인 레오나르도 허세의 악기 밴조였다. 이 밴조는 섀클턴에게 사기를 유지하는 아주 중요한 "필수 정신 의학"이라고 했고, 엘리펀트 섬에 상륙하기 위해 구멍 난 배를 타고 5일간 여행할 때도 소지하고 있었다.


식량이 떨어지면서 남극에 있던 펭귄과 들로 식량을 조달한다. 거대한 빙판이 깨지면서 천둥소리와 같은 울림이 밤새도록 울린다. 그들의 주위로 떠내려오는 부빙과 빙판들 때문이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걱정해야 했다. 식량이 부족해서 그들과 함께 열매도 끌어주고 쓸매달리기를 연습했던 개들을 잡아먹었고, 개사료를 먹기도 한다. 침몰하는 배에서 3척의 보트를 가져온다.


녹는 얼음을 피해서 작은 보트에 나눠서 도착한 곳은 '엘리펀트 섬'이었다. 새똥들만 가득한 곳이고 구조선이 지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그 보트를 오두막 삼아서 콩나물시루처럼 부둥켜 생활한다. 그 안에는 눈 속에 있던 펭귄의 똥이 녹아내려 그야말로 똥통을 방불케 하는 곳에서 바짝 누워서 시커먼 연기에 찌들어서 살아도 행복했다.

섀클턴은 제비뽑기를 하여 좋은 침낭을 뽑기 할 때도 자신은 속임수를 써서 좋은 것은 대원들이 사용하게 했다.


엘리펀트 섬에서 3 일반 만에 식사를 한다. 오들리, 위디, 클라크, 리킨슨, 하우, 섀클턴, 베이클웰, 커어, 와일드이다. 모두들 휘청거리며 땅에 올라섰는데 헐리는 '베스트 포켓 코닥'카메라를 들고 상륙하는 장면과 엘리펀트 섬의 첫 식사 장면을 찍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4월 20일 섀클턴은 대원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한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보트)를 타고 사우스 조지아 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계획이었다. 이제 막 엘리펀트 섬에 도착한 처지에 엄청난 계획이었다. 여기서 사우스 조지아 섬까지는 무려 1,000킬로가 되는 곳을 겨우 6미터 길이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한 바다 위를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는 것이다 그 바다는 시속 100킬로 바람이 불고 20미터의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린다. 이 계획은 누구나 "도저히 불가능했다"라고 생각했다. "6명이 커드 호를 타고 조지아로 간다" 맥니쉬는 이렇게 적는다.

얼음과 빙하로 둘러싸인 망망대해에서 보온장비 하나 없이 식량부족과 추위와 싸우면서 생활해나갔던 자료와 함께 기록들은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들의 생생한 기록을 바탕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게 전해주는 시사점은 위대하다.

엘리펀트 섬에 고립되어 있을 때 힐리가 1916년 5월 10일에 단체 사진을 찍었다. 헐리의 일기에는 "가장 지저분한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6명의 대원이 사우스 조지아에 도착해서 건너편으로 갈려고 눈 덮인 산의 골짜기 정상을 갔지만 눈앞에 드러난 풍경은 호수로 보였던 것이 섬의 북쪽 해안 바다였고 도저히 내려갈 수 없는 절벽이 있었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도끼를 찍으면서 한발 한발 내려온다. 결국 절벽을 내려와 모래 해변의 포경기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구조를 요청한다. 천신만고 끝에 3번의 구조선 요청에 의해 아르헨티나 정부의 구조선을 이끌고 엘리펀트 섬에 남아 있던 22명의 대원들을 구출하면서 선원 모두를 구조하게 된다.


섀클턴의 시대에는 해군 입대가 영국 청소년의 로망이었다. 그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되었고 상선에 일하면서 영국 군함 유니언 잭을  때마다 대영제국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뉴욕에서 지브롤터를 향하면서 극지방을 탐험하겠다는 맹세를 했었다.


배를 버리고 철수하면서 대전을 구하겠다는 결단의 리더십, 침울하고 있는 대원들에게  소리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들여주는 감성의 리더십, 자신도 굶으면서 대원을 먼저 생각하는 희생의 리더십. 영광과 명예가 사라지고 생존만이 남겨진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 대원들에게 " 다음번에 다시 자신과 극지방을 탐험할 생각이 없느냐?"라고 물었을  ""라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헐리의 일기에서 대원들이 자신의 기본 장비조차 대수롭지 않게 관리하고 책임을 회피했지만 섀클턴은 자신들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고 대원들 역시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했다. 아버지와 같은 책임감을 가진 정신적인 지주로 단합을 이끌었다. 엘리펀트 점에서 5명의 대원을 이끌고 반드시 구하러 오겠다는 약속을 대원들에게 남긴  구명보트 제임스 커드 호를 타고 사우스 조지아 섬에 도착했지만 노를 잃고 아무도 살지 않는 목적지 반대편에 표류한다. 극도로 쇠약한 3명을 그곳에 두고 섀클턴과  명의 대원이 산을 넘고 빙하를 건너 지도에 나오지 않는 언덕을 넘어 포경기지가 있는 스트롬니스 만에 도착하는 믿음을 주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침몰하는 인듀어런스 호에서 빠져나오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성경의 두 부분을 찢어서 나온다. 얼음은 어느 모태에서 나왔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을 돌같이 굳게 얼리는 이 받의 수면도 얼게 하는 이가 누구냐?(욥 38:29~30)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라고 시작되는 시편 23편도 찢어서 가지고 있었다.  주께서 너를 도우사 모든 위험을 뚫고 너의 행실을 인도하시길 원하노라 그곳이 땅이든지 바다이든지. 도 네가 주의 일과 사망의 깊은 곳에서 행하신 그의  모든 놀라운 능력을 보리이다.(시편 23)  


사후 섀클턴이 남긴 일기에 그가 이전에 남긴 위스키 이야기를 들은 후 이 위스키를 찾으러 원정대가 꾸며지며 이로 인하여 섀클턴 위스키가 탄생하게 된다.



섀클턴이 남극 탐험으로 떠나갔을 때 스카치위스키 몇 통을 가져갔는데 베이스캠프 오두막에 묻고 미처 그것을 가져오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서 100년 사이에 유럽은 1,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많은 지역의 피해를 입었고 도중에 화이트 앤 맥케이 양조장(Whyte & Machay)에서 오리지널 스카치위스키 제작법이 유실되었고 남극의 술상자는 묻혀 100년이 지났다. 2006년에 어니스트 섀클턴의 자서전을 보던 중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한다. 냉기가 드리운 남극의 땅에 위스키 다섯 상자를 오두막에 묻어 두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토대로 100년 전에 버려진 캠프로 뉴질랜드의 남극 유산 보존 재단에서 원정대를 꾸린다. 그들은 영하 60도의 추위를 뚫고 난파의 위험을 감내하며 결국에 100년 전의 신비를 가진 위스키가 잠든 오두막에 도착한다. 100년의 세월을 견딘 위스키를 발견하는데 위스키 상자 3개, 브랜디 상자 2개, 하지만 100년의 시간 동안 날씨와 얼음의 두께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고 11병만 온전하게 남는다. 100년 전 사라진 오리지널 위스키가 돌아온 양조장은 큰 소동이 일어나고 100년 만에 부활한 위스키에 섀클턴(Shackleton)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섀클턴이 런던 교외에 있는 시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독서하는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섀클턴은 자라면서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바다로 나가려 했다. 이유는 당시 학생들이 즐겨본 신문에서 모험과 관련된 기사와 쥘 베른의 연재 소설 '해저 2만리'를 보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신문의 활자 속에 펼쳐진 모험과 신비한 세상, 미지의 대지는 섀클턴에게 준비된 인생이 되었다. 가정 형편 상 해군사관학교에 못 간 그는 열여섯에 선원이 되고 이 시절에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라는 좌우명을 마음에 두었고 항해사가 되는 과정을 24세에 마치게 된다. 1898년 4월에 그는 어느 바다로 갈 수 있는 선장이 된다. 젊은 나이에 파격적이었는데 섀클턴은 항상 책을 가까이하면서 다른 선원들과 조금 다른 생활을 하였다. 섀클턴이 성장하면서 읽었던 책, 그리고 영향을 받는 수많은 글들은 우리의 마음속에도 존재한다. 그가 유년시절 읽었던 '해저 2만리'를 오늘의 청소년들이 읽고 희망을 품고 도전하는 마음은 100년이 지나고 그러할 것이다.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를 이끌었던 동력은 유년시절을 거쳐 그의 삶을 지내한 독서력에 있었다.

2022년 새해에는 섀클턴의 위스키라도 구해서 마시면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감성, 그가 가졌던 열정, 책임감, 배려심, 소통 능력의 리더십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래는 얼마전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의 리더십을 KBS 대전 RADIO에 소개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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