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소깍부터
2022년 1월 4일 화요일 날씨는 맑음이다. 쇠소깍은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곳이다. 여름에는 이 조각배 테우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월요일인 전날은 한라산을 등산하고 온터라 오전에는 쉬고 오후에 6코스를 걷기로 했다. 하효동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 21분이다. 차량을 여기 주차장에 세우고 걷기 시작한다. 효돈천 하구(깍), 쇠는 효돈의 옛 지명이고, 소(沼)는 연못이다. 쇠소깍은 효돈에 있는 바다와 하구가 만나는 연못이다.
소금막은 소금이 귀한 시절에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서 생산하고 저장했던 곳을 말한다. 6길의 시작 지점에 간세가 소금막이라고 기다린다.
게우지코지, 생이돌이라고 한다. 바다에 기암이나 특별한 형체의 돌들의 굳어진 모양새를 게(개)우지코지라고 한다. 이 기암괴석들은 새들의 화장실과 함께 휴식공간이자 새들이 노는 공간이다. 그래도 생이돌이나 생이바위라고 한다.
별(star)다육식물인데 뿌리가 보일 듯 말 듯 살색 빛깔의 소담한 크기의 식물이 담벼락에 성게가 붙어 있듯이 자라나고 있었다. 작은별, 큰별, 중간별들이 사이좋게 그들의 담벼락 공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생명력이라는 게 참으로 끈질기다. 자세히 보니 콩나물 크기의 뿌리들은 담벼락에 앉아 있는 한올의 먼지에 의미하고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한참을 쳐다 보다가 이 다육식물들이 바다로 향하고 있고 이 집은 ㄷ자(字) 형태로 담벼락이 있는 평범한 집인데 3면이 모두 이런 다육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집의 주인장은 이 아기자기한 다육이들을 얼마나 잘 보살펴주었을까? 그대로 두기만 해도 자란다는데 나중에 알고 보고 서귀포 지역의 담벼락에 유독 이 다육식물들이 많았다.
담벼락치고는 상당히 크다. 비스듬하게 쌓아 올려져 있고 덩굴나무가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고 그 위로 하늘 아래 야자수 나무가 하늘로 가고픈 욕망을 펼치고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덩굴나무들이 아직 붉은색을 띠고 있다. 육지라면 이미 이 잎새들은 떨어지고 줄기들만 앙상하게 뻗어가기를 멈추고 있을 텐데 햇살과 기온이 허락하는 한 이들은 끊임없이 담벼락을 의지하고 아니 담벼락을 점령해나갈 것이다. 도시에는 이런 덩굴식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는 곳도 있다. 이 덩굴 줄기를 타고 뱀들이 서식하거나 위협을 가하기 때문이다.
보목포구이다. 바닷물이 흘러가는 포구로 마을이 아담하다. 포구를 돌아내려가는 동네가 정겨운 우리네 마을과 같다. 차로 돌아보면 보이지 않고 오직 걸어야 보이는 마을의 안길이 보인다.
마을안길에 간혹 차가 지나가는데 아마도 이 동네 현주민인듯 하고 다른 외지의 차량은 보이지 않지만 이 동네의 전형적인 마을길이다. 다만 이 언덕너머로 개를 키우는 집이 있었는데 개가 많다. 개가 짖는 소리가 심한데 지나는 올레꾼들은 조심해서 조용히 걸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이 된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터전이고 동네를 구경오는 길손들이 너무 많아 귀나 눈이 거슬리면 나도 좋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탈리아의 오버투리즘도 그런 일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구두미포구로 포구가 거북이의 머리와 꼬리를 닮았다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뭍은 경작지와 암반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소목포구를 지나면 구두미 포구는 섭섬을 앞에 두고 있다. 서쪽에서 보면 거북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구두미로 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천지가기전의 길인데 사진을 찍을 때 콘트라스트를 조금 낮춰주고 찍어야 한다. 아래부분에 손을 터치하고 콘트라스트가 나오면 낮추어 찍으면 이런 사진이 나온다.
소천지라 하여 백두산의 천지와 닮았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날씨가 맑고 바람이 없는 날에는 한라산을 담을 있다고 한다. 같이 가셨던 일행분이 여기가 가장 좋았다고 한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3번이나 오는 곳이다. 처음 그러한 생각이 들었는데 올 때 마다 한라산을 반영으로 넣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남부 해안길을 따라 걸어오다 보면 보목 하수처리장이 나온다. 여기 사무실 앞에 있는 동백이 석양의 해를 받아서 더욱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백년초가 담벼락에 피었다. 육지의 백년초라면 추위에 꼬부랑 쓰러졌을 텐데 여전히 건재한 것을 보면 백년초는 꽃을 피우고 난 후에는 다시 열매를 맺겠지. 바위틈에서 살아나가는 백년초를 청소년들이 자신의 방에 화분으로 두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는 마음이 기특하다.
담벼락 위에 난 동백꽃이 너무 예쁘다.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핀 제주는 동백꽃이 제대로 된 가치를 평가를 못 받고 길지나는 사람들도 눈여겨 봐주지 않는다. 만일 이 동백꽃이 제주에서 한 나무였다면 꽃봉오리를 피운 얘기 동백을 보러 구름처첨 모여들겠지.
제주 KAL호텔로 통하는 올레길은 국유지 점유 분쟁으로 인하여 1985년에 폐쇄되었다가 최근에 조정위원회를 거쳐서 37년간의 못 지나갔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시기들에게 공공도로로 영구 개방이 되었다. 얼마 전에 걸었던 사람들은 이 길을 못 걸었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우리는 KAL호텔을 관통하는 쪽문을 이용하여 유유히 호텔의 풍경이 보이는 길을 걸었다.
KAL호텔을 나가서 왼쪽으로 해안 통로를 오르면 뷰가 훤하게 보이는 '허니문하우스'라는 카페가 나오는데 유명한 맛집중의 하나이다. 뷰 그차로 인가가 높아서 항상 손님들이 붐빈다.
이중섭거리가 6코스에 키워드이다. 이중섭 작가는 평안남도의 평원 출신으로 외가의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외조부가 평양내 손꼽히던 부자로 사업이 아주 번창하였다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서양화가 임용련으로 부터 미술교육을 본격적으로 받아 미술계에 입문한다. 민족 정기에 대한 교육은 받은 이중섭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시회에 제출하는데 오산학교 시절 민족교육의 영향을 받아 작품의 주제를 '황소'로 잡고 황소를 소묘하는 작품으로 참가한다. 당시 일본인에게는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황소라고 할 정도로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동물이었다. 일부러 표현 자체를 꺼려하는 분위기였는데 중섭은 보란 듯 작품을 그려낸다.
전시회에 비교적 그림을 크게 그려 내는 기조를 알면서도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를 그린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가 이중섭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1936년 일본제국대 미술 학교(현대 무사시노 미술대)에 입학하지만 1937년 자유롭게 혁신적인 작품을 좋아했던 그는 도쿄 분카 학원(문화학원)으로 옮긴다. 1941년 도쿄에 생활하던 조선인 화가인 이쾌대, 진환, 최대덕 등과 함께 조선신민미술가 협회를 결성, 1943년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을 수상했다.
1945년 고향인 평남으로 돌아와 그 해 5월 원산에서 일본인 이남덕(일본 본명 야마모토 마사코 -山本方子)과 결혼한다. 이남덕은 이중섭을 분카 학원 유학 시절에 만났다. 1946년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지만 1주일 만에 사직하고 같은 해 친구인 구상 등이 펴낸 시집의 표지를 제작 맡았는데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 작품으로 규정된 필화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한국 전해 해인 1950년에 월남해서 경남 부산, 통영, 제주도를 다니면서 살았다. 통영에서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일생에 있어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기였다.
이중섭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리는데 이 대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게 된다. 1953년에 부두가 노동으로 마련한 돈과 함께 선원증을 가지고 일본 처갓집을 방문한 것이 그와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선원증은 일본에 체류를 1주일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으로 귀환했다.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지에서 소의 그림을 열심히 그려서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가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들 속에는 황소의 그림이 잘 그려져 돈을 버리게 되면 기필코 가족을 데리러 일본에 다시 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시기이다.
아래의 사진은 이건희 컬렉션의 전시회 때 작가 본인이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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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작년 국립 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서 만난 소는 손바닥보다 약간 큰 그 그림이었지만 이 황소 그림은 한 번의 붓 터치로 글 내려가는 것이 황소와 같은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었다. 황소의 눈은 가족을 데려오고야 말겠다는 중섭의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중섭이 1950년데 피난시절에 그림 바닷가의 추억이다. 이 작품도 이건희 미술 컬렉션에서 나온 작품 중의 하나이다. 눈이 펑펑 내리고, 거리로 나앉은 피난민들은 그저 새와 물고기 등 동물들과 어울려 나뒹굴고 있다. 이중섭은 가족을 데리고 원산폭격을 피해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남하했다고 전해진다. 거제를 거쳐 제주도로 왔는데 첫눈은 내리고, 이들은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해 외양간 신세를 지기도 했다고 한다.
제주의 푸른 바다가 가족과 가장 가까운 바다였는데 부족함 없이 성장했던 그가 가족과 헤어져 살면서 만날 수 없다는 애한을 피력하면서 그려갔던 작품 속에 있는 대가의 힘을 후세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그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가 머물렀던 집의 땅을 한번 밟고 그가 어떤 세월을 살아갔는지에 대한 자체만으로 그의 힘을 느낀 하루였다. 올레 6길의 마지막 지점에 가까운 곳이어서 해가 지고 나서 집만 볼 수 있었고 미술관은 들어갈 수 없었다. 이중섭의 화내 마사코는 도쿄에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살아왔다. 2021년이 100세이고 이중섭의 작품이 몇십억대인데 그들의 삶은 아직도 일반인의 삶을 살아간다. 도쿄에서 전쟁중에 겨우 배편을 구해서 이중섭을 위해서 현해탄을 건너와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아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 애환을 매일 그림엽서로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