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평 아왜낭목
1월 5일 수요일 오전 9:46분부터 올레 7코스를 걸었다. 이 날은 특히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제주 기상은 변화무상하기에 각자가 우산, 우비, 판초우의 등을 준비해야만 했다. 올레7 코스를 역으로 걸었는데 지인이 도중 짧게 함께 걷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도착한 곳은 월평 이왜낭목 버스정류소였다.
카카오지도 스카이뷰로 보기 위의 링크 참조
각자의 우천 시 입거나 준비한 용품들이다. 색깔이나 의상이 다양하다. 비도 막아줘야 하고 바람도 막아주면서 보온을 유지해야 함으로 따뜻한 자킷을 안에 입고 방수기능이 있는 윈드브레이크를 착용하면 좋겠다.
걷기 시작하면서 올레(골목) 돌담에 핀 다육이들이 빗물을 머금도 얼굴을 빼꼼 내밀면서 오래간만에 흡벅 물놀이를 한다. 아기도 어미도 형제, 자매들도 즐거워한다. 아무런 조건이나 환경을 따지지 않고 욕망도 없는 듯한 다육이들이 돌멩이 있는 먼지나 흙에만 의지한 채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채로 당당히 살아가는 모습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1월의 제주 올레길의 담벼락에 이런 이쁜 다육식물들이 너무 많다. 발길을 너무 머물다가 일행으로부터 또 뒤처진다.
모델 한박사는 미소와 함께 포즈를 잘 취해준다. 명쾌하고 책임감이 있어서 나는 좋다. 다만 '한라봉', '한라봉'을 매일 이야기하는 데 아직 못 사주고 있다. 제주에 와서 내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왜 귤나무에서 귤이 자동으로 떨어지도록 귤을 수확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냐는 것이다.
월평동 해안은 제주도 내에서도 해안단구가 가장 달 발달되어 배를 정박시키기가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월평포구는 이천장물이 바다와 합수하는 곳으로 하천의 하구에 조그마한 만이 만들어져 이렇게 배를 정박시키는 포구로 이용하였다. 월평 마을 사람들은 마을 중심이 아니라 포구에 사까이 사람이 먼저 살고 농업보다 어업이 더 중요한 생계수단이었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테우(뗏목)로 가파도나 마라도까지 진출하여 어로 활동을 하였다. 월평 해안은 서귀포 최고의 비경을 자랑한다 하여 서귀포 70경에 지정되어 있다.
오전 10시 25분에 강정마을에 도착한다. 강정마을 해군기지가 생기기 전후로 하여 많은 일들이 있었다. 부지 선정부터 시작하여 기지를 만들지 안 만들지 그리고 찬성과 반대의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아직도 강정마을 여기저기에는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상흔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연대(煙臺)는 말 그래도 연기를 내는 기단이다. 봉수(烽燧)가 산의 정상에 있다면 연대는 제주 해안 연안에 설치되었고 적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봉대(烽臺)는 오름에 위치한 것과는 달리 유사시에 적과 대치되는 상황에서 싸워야 하는 요새 시설이었다. 고려말에 왜구 침입을 위해 설치하기 시작하여
제주에는 연대가 38개소에 있고, 봉수는 24개소에 있다.
해군기지인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군인들이 상주해야 하면서 그들의 신앙 시설도 만들어 되었다고 한다. 교회와 함께 다른 종교인 사찰도 만들어져 있다.
1월 초순의 제주는 영하의 날씨는 아니지만 남도의 오키나오와 같은 날씨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판초우의를 이 여정을 위해 미리 구입해서 준비해두고 있었다. 신발은 거의 10년을 나와 함께 지내고 있는 등산화인데 이번 여정에 눈 덮인 한라산 등반부터 시작하여 오름이나 바위나 돌멩이로 된 길들을 무리 없이 걷게 해 주었다. 방수와 바닥의 그립이 딴딴해서 물샘이나 미끄럼 없이 사계절 동안 착용하기에 실용적이다. 제주 올레길을 순례하는데 참고가 되면 좋겠다.
제주의 1월의 애기동백이 꽃을 피워 만발하였다. 비가 오는 날에도 그들은 붉디붉은 동백을 보여주었다.
강정교에 만들어진 석물 안 속에 다시 조각품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비 오는 날도 춥지 않게 안쪽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강정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해안선을 따라 걷는 길이 나온다. 물론 범섬을 오른쪽을 바라보면 역으로 걷는다. 이쪽 7코스의 해안길을 크고 작은 바위가 아주 많은 길이므로 신발의 바닥면이 두꺼운 것을 선택하고 지팡이가 있다면 수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월 6일의 날씨라 제주의 유채꽃이 만발하기에는 무리이지만 꽃들이 여기저기 피기 시작하고 있다. 우산을 1월에 쓴다고 해도 손이 상당히 시리다. 바람까지 불고 빗물에 손이 젖으면서 손이 시렸다.
비가 오는 내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계속 사진을 찍었다. 물기로 인하여 터치가 잘 작동되지 않거나 폰의 충전 케이블에 액체가 감지 되어 보조배터리 충전을 거부하는 메시지도 뜨기도 하였다.
까마귀 혹은 물새들이 이 돌아 앉아서 똥을 싸기에 희게 보인다 하여 흰돌이라고 한다. 밑은 아래라는 말인 사진의 가운데 몇몇 바위 들이다. 이 바위들은 흔적은 없지만 환해장성터라고도 한다.
외돌개에서 강천항쪽으로 걷을 때도 계속해서 범섬을 보게 된다.(사진 맨가운데 위) 이 범섬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목호의 잔당 세력을 처단하고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뒤 제주에 온 판관 하담은 자신의 일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뇌가 땅을 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
당시 참상이 두 줄로 묘사되어 있는데 섬 인구의 거의 절반이 죽어갔다고 한다. 제주 돌들이 구명이 숭숭 나있는 이유도 그때 죽은 원혼들의 한 숨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목호의(牧胡의 亂) 난:1374)
저 멀리 범섬이 보인다. 고려 땅이 모두 몽고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친몽파인 고려 문신들이 대몽 항전파 무신 정권을 무너 드리고 개경으로 환도하고 몽골과의 전쟁은 끝나는 듯하였는데 고려는 원나라 속국으로 전략한다. 무신정권의 최후 세력인 삼별초가 몽골과 결사항전을 선언하고 강화에서 진도, 진도에서 다시 남쪽 제주로 퇴각을 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고려 파견 관료들에게 온갖 핍박을 받고 수탈을 당하면서 삼별초는 그들의 수호신으로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항전을 위한 요새(항파두리 토성)와 해안 성벽(환해장성)을 쌓는 일은 섬사람의 몫이었다. 1273년 4월에 이르러 2년 동안 엄청난 공사에 동원되어 피와 땀을 흘렸지만 삼별초의 용맹은 고려와 몽골 1만여 병사에 손을 들게 된다.
삼별초가 토벌된 후 몽골군 일부가 섬에 남고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바뀐다. 독립국가 탐라가 고려에 흡수된 지 170년 만에 다시 몽골인들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된다. 몽골(원나라)에게는 제주는 2가지 측면에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첫 번째는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최적의 위치였다. 두 번째는 '말'을 키워서 공급받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제주는 그 이후에 100년간 몽골제국(원)이 가진 14개 목마장 중 하나로 운영되며 수탈되어 간다. 이 기간에 고려 관료들도 파견되지만 더 상급 세력으로서 원 제국의 말 사육 전문가들인 목호(牧胡)들이었다. 목호는 몽골이 제주도에 말을 사육하기 위한 몽골인(胡)이다. 고려 관료뿐만 아니라 몽골의 목호들 양쪽에서 수탈을 당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의 대륙은 주원장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다. 고려는 지는 해인 원나라보다는 명나라를 섬기야만 했다. 명은 이에 제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말을 2천 필 요구하고 고려는 제주로 사신을 보내 명이 요청을 전한다. 100년 동안이나 섬을 지배해온 원나라의 묵호 세력들이 이에 응할 리가 만무했다. 대신 고려가 보낸 조정의 사신을 죽이고 고려 공민왕은 최영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묵호 토벌대를 제주로 보내는데(목호의 난) 전함이 314척, 군사 25,600명이나 되는 대군이었다. 삼별초 진압 여몽연합군의 군사보다 2배가 넘었다. 100년 전 삼별초 항쟁 이후 다시 제주에 피바람이 불었다.
제주에 있던 목호는 겨우 1,700명이는데 당시 최영 장군의 토벌대는 제주 전체 연구에 맞먹는 숫자였다. 고려 조정은 섬 전체가 이미 100년이 흐르면서 몽골인과 한통속이라고 판단했다. 제주에 상륙한 토벌대는 목호 세력을 중간 산악 지역으로, 한라산 남쪽으로 퇴각하고 대다수의 목호는 토벌대에 의해 죽어간다. 살아남은 일부들은 서귀포 앞바다에서 범섬으로 건너가 일본이나 남송으로 탈출한 생각이었지만 이 섬을 포위한 고려군 전선에 의해 진압되고 대부분은 수직으로 깍아내려진 범섬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을 하고 생포된 자들은 즉결 사형되었다.
고려의 제주도 남쪽 서귀포 앞에 있는 범섬은 몽골이 점령하면서 말을 키웠던 목호들의 최후의 섬이었다.
12시 43분에 이레 7 쉼터이다. 수요일이나 쉼터의 카페나 매점은 영업을 하지 않았다. 수요일은 제주도의 많은 식당들이 영업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요일의 중간이라 손님이 제일 찾지 않는 날이라 그렇다 한다.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담당 책임자가 서귀포시 공무원이라도 적혀 있을 것을 보아하니 시에서 관리해서 화장실이 깨끗하고 화장지도 여유분 한통이 더 있었다. 걸으면서 커피나 음료수, 그리고 알코올을 마시는 것이 안 좋은 이유는 화장실을 찾아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인데 화장실이 안 보이며 대충 낭패다.
해안도로가 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오른쪽 바깥쪽은 큰 돌들이 위치하고 있는데 작은 돌이나 자갈을 걷기가 편하게 인위적으로 깔아 놓인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를 위한 누군가가 이렇게 편하게 깔아 둠에 감사를 느낀다.
해병대의 도움을 받아 만든 길이다. 원래 길이 없었는데 큰 돌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해병대 대원들이 작은 돌들을 채워서 길을 이어 만든 곳이다. 삽과 곡괭이로는 무리겠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길에 그들의 노고가 느껴진다.
길의 경계를 알아보기 쉽게 돌멩이들을 더 쌓아 두었다.
법환포 앞에는 제주 해녀상이다. 해녀 마켓도 있고 해녀학교도 있다. ㅈ에 아래아(.)를 써서 발음되는 것이 잠보다는 좀에 가까운데 잠녀보다는 좀녀상으로 되어 있다. 잠녀, 좀녀 보다는 일반적으로 해녀라고 불리운다.
이쪽부터는 수봉로라 불리는 길이다. 2007년 12월 길을 찾던 올레지기가 '김수봉'씨가 염소가 지나가는 길을 보고 삽과 곡괭이로만 길을 만들었다고 해서 수봉로라 불린다. 수봉로로 걷다 보면 큰 돌덩이에 구멍이 나 있는데 지나는 올레꾼들이 그 구멍에 맞는 작은 돌들로 채워져 있다.
몽돌처럼 둥글둥글하지는 않지만 맨질 맨질 하고 납작한 돌멩이들이 길을 열어준다.
야자수길은 제주에서 제일 많이 보인다. 여기 아래에 해녀가 하는 포장마차가 있는데 비가 오고 겨울이라 열려 있지 않았다. 부침개와 막걸리 한잔을 걸치며 걸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든다.
수봉로를 지나면 야자수 동산이 나온다. 온갖 세월을 이겨낸 야자수들이 바람이나 태풍에도 굴하지 않고 쑥쑥 성장해나가는 무리들을 볼 수 있다.
서귀포답게 귤 농장이 많다. 여기도 수확하지 않는 귤들이 그대로 지천으로 늘려 있다. 가운데 보이는 건물은 서귀포여자고등학교 건물이다. 고등학교 건물 앞에 귤나무들이 많아서 '고등학생들이 귤을 많이 먹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돔베낭골을 지나면 담벼락 사이의 길이 나온다. 돔베는 도마, 낭은 나무이다. 도마처럼 납작한 상록수가 많은 곳이 돔베낭골이다.
20미터로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돌, 외돌개이다. 150만 년 전 화산 폭발 당시에 섬의 모습이 바뀌던 시기에 생긴 섬으로 꼭대기에 소나무가 몇 그루 있다.
판초우의를 입고 한 손에는 계속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다시 주머니에 넣고, 바람의 세기를 강해진다. 잠시 일행들이 외돌개 주차장에 있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에 몇몇은 여기 외돌개 버스정류소에 비를 피해 앉았다가 일어섰다가를 반복했다. 출발 장소에 차량을 두고 왔기에 차량을 픽업하러 한 박사가 택시를 타고 가고 우리는 저녁식사 장소인 네거리 식당으로 향해 걸었다. 우리가 이날 걸었던 거리는 18킬로미터 정도 된다. 추운 날 바람 불고 비 오는 길을 걸은 후에 먹었던 '네거리 식당'의 갈칫국은 대한민국 최고의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