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우리도 인간이라 끊임없이 자살도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찾지만 그 유명한 톨스토이도 우리와 같이 고민을 했었다. 그는 어디에서 답을 찾았을까? 제미나이를 참고하여 만들어 보았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세계적인 작가이자 러시아 최고의 명문 백작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광활한 영지를 소유했고, 농부들이 부러워할 만큼 건강했으며, 사랑하는 아내와 13명의 자녀가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행운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 모든 것을 가진 그는 쉰한 살의 어느 겨울밤부터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혹시 모를 유혹 때문에 매일 밤 방 안의 밧줄을 치워야 했고, 너무나 쉽게 생을 끝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냥을 나갈 때면 일부러 총을 두고 가야 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었을까요?
그의 영혼을 잠식한 것은 단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 더 큰 명성을 얻어도 결국 그 끝에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철학책을 뒤지고 과학을 탐구했지만 어디에서도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철학이나 과학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삶의 비밀에 대한 놀라운 해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한 위대한 작가의 이야기이자,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 모두가 마주하게 될 질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당신의 ‘괜찮은 삶’이 거짓일 수 있다는 충격적인 경고
톨스토이의 걸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판사입니다. 그는 자기 계층의 방식대로 성실하게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도 주변에서도 인정하는 ‘괜찮은’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성공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경력을 쌓고, 적당히 체면을 차리며, 남들만큼의 안락함을 누리는 것. 그는 사회가 정해놓은 방식대로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는 자신의 삶 전체가 공허하고 거짓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병이 주는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주변 사람들, 즉 그의 가족과 의사들이 퍼뜨리는 ‘거짓’과 ‘기만’이었습니다. 모두가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명백한 진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단지 아플 뿐”이라는 거짓말에 동참하기를 강요했고, 이 거짓의 네트워크는 그를 극심한 고통과 외로움 속에 가두었습니다.
What tormented Ivan Ilych most was the deception, the lie, which for some reason they all accepted, that he was not dying but was simply ill... This deception tortured him – their not wishing to admit what they all knew and what he knew, but wanting to lie to him concerning his terrible condition...
이것은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적 성공과 관습에 맞춰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톨스토이의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삶은 진실한가? 톨스토이는 ‘진정한 삶’은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삶을 둘러싼 모든 거짓을 걷어낼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반 일리치의 공허한 삶은 톨스토이가 그토록 경멸했던 지식인 계층의 삶,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해답을 찾기 위해 그 반대편으로, 즉 이성적 사유가 아닌 소박한 믿음의 세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2. 해답은 철학이 아닌, 가난한 농부에게 있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 직전까지 내몰렸던 톨스토이는 과학과 철학에서 답을 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냉정하게 답했습니다. “당신은 우연히 태어난 입자 덩어리일 뿐이다.” 그는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석가모니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의 글을 파고들었지만, 그들의 결론 역시 삶의 유한함과 고통을 직시하며, 결국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지식인들의 이성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톨스토이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영지에서 일하는 농부들, ‘무지크(mujiks)’라 불리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그들의 삶은 톨스토이보다 훨씬 더 비참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들은 평생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고되게 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톨스토이처럼 절망하거나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을 긍정하고, 고통을 견디며, 죽음을 자연스러운 섭리로 평온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가진 평온의 원천은 이성적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톨스토이가 ‘비합리적 지식’이라 부른 것, 바로 ‘신앙’이었습니다. “신이 나에게 이 삶을 주셨고, 신이 원하시는 대로 살다가 신이 부르시면 돌아간다.” 이 단순한 믿음이 유한한 인간을 무한한 존재와 연결해주며, 죽음도 파괴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이성은 “너는 먼지일 뿐”이라고 속삭였지만, 신앙은 “너는 신의 자녀”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위대한 깨달음은 바로 이 지점에 있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은 가장 복잡하고 높은 지식이 아니라, 가장 단순하고 낮은 곳, 소박한 민중들의 삶 속에 있다는 역설이었습니다.
농부들의 ‘신앙’이 단지 내세에 대한 믿음이었다면 톨스토이를 그토록 감동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그 믿음이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발현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굶주린 이에게 빵을 건네는 손길 그 자체였습니다.
3. 우리가 아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톨스토이가 마침내 발견한 삶의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낭만적 감정과는 거리가 멉니다. 톨스토이에게 사랑이란 ‘이웃에 대한 헌신, 봉사, 희생을 포함하는 실천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추상적인 단어가 아닌, 구체적인 행동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이러한 사상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벌을 받아 인간 세상에 내려온 천사 미하일은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마지막 질문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하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미하일은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아가 된 쌍둥이 자매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한 여인을 통해 그 답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이나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진리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염려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 하나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그 안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통찰입니다. 톨스토이는 ‘사랑’이라는 뜬구름 잡는 듯한 단어를 땅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에서 외로운 구두 수선공이 추위에 떠는 이웃에게 따뜻한 차와 음식을 대접하는 행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한 여인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기르는 행위.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가 말하는 ‘사랑’의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거짓된 삶(1)을 버리고, 소박한 믿음(2)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행동(3)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면,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이라는 우화를 통해 그 실천적 지침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4.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 사람, 그리고 일
톨스토이의 단편 「세 가지 질문」에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지혜를 찾고자 하는 한 왕이 등장합니다. 그는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확신이 서지 않아 늘 고민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그는 지혜롭기로 소문난 한 현자를 찾아가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두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현자는 말로 답하는 대신, 왕이 직접 경험을 통해 깨닫도록 이끕니다. 왕은 자신을 죽이려다 부상을 입고 쓰러진 남자를 발견하고 정성껏 치료해줍니다. 이 경험을 통해 왕은 마침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얻게 됩니다. 현자는 왕의 깨달음을 이렇게 정리해줍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제일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생산성, 장기 계획, 미래의 성공을 위한 네트워킹이라는 강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반직관적인 지혜입니다. 우리는 늘 미래의 더 중요한 ‘때’를 기다리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을 만나려 애쓰며, 더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합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인생의 모든 의미와 가치는 거창한 미래 계획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선을 베푸는 아주 단순한 행위 속에 존재한다는 역설적인 지혜를 들려줍니다.
현재, 내 앞의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삶의 핵심이라면, 그 사랑의 가장 어려운 실천은 무엇일까? 톨스토이는 그 답을 ‘악에 대한 무저항’에서 찾았습니다.
5. 악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가장 어려운 계명
톨스토이가 말하는 사랑의 실천은 가장 극단적인 상황, 즉 악과 마주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의 사상의 핵심 중 하나인 ‘무저항주의(non-resistance to evil)’는 사랑이 단순히 친절을 베푸는 차원을 넘어, 악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는 적극적인 윤리적 태도임을 보여줍니다.
단편 「촛불」에서 이 사상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악독한 관리인에게 착취당하던 농부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한 노인이 그들을 만류하며 인내와 용서를 통해 악을 극복해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이후 관리인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게 되고, 농부들은 폭력적인 복수가 아니라 비폭력적인 저항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결코 소극적인 굴복이 아닙니다. 톨스토이에게 폭력은 그 어떤 경우에도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악의 순환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본질은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며, 사랑은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가르침은, 그 이웃이 나를 해치려는 원수일 때 가장 어려운 시험에 직면합니다. 톨스토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조차 폭력이 아닌 사랑과 용서를 선택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는 그의 가장 급진적이고 실천하기 어려운 삶의 비밀이었습니다.
톨스토이가 평생의 고뇌 끝에 도달한 지혜는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타인’에게로, ‘복잡한 사유’에서 ‘단순한 실천’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현재에 대한 사랑’으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결코 완벽한 성인의 고고한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평생 자신의 욕망과 이상 사이의 괴리 속에서 고통스럽게 싸우고, 매일 넘어지고 매일 다시 일어서려 했던 한 인간이 남긴 ‘생생한 증언’이기에 우리에게 더욱 깊은 울림을 줍니다. 도리어 톨스토이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의 글은 우리에게 더 깊은 울림과 설득력을 줍니다. 그의 불완전함이 그의 지혜를 우리에게 더 가깝고 실천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1910년, 아스타포보의 작은 기차역에서 숨을 거두기 전, 그는 일생을 바쳐 탐구했던 질문에 스스로 답했습니다. “나는 사랑하기 위해 살았노라.” 이제 그 질문이 우리에게로 향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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