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사실은 디데이를 카운트하며 퇴사의 과정을 기록할 계획이었다. 바로 직전에 올린 글을 쓸 때만 해도 218일 남았다며 마음을 다잡았던 나는 126일을 넘기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별안간 퇴사해버렸다.
이번에는 왜 퇴사했는지 저번의 퇴사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좀 따져야겠다. 전이라고 계획적으로 퇴사한 건 아니지만, 보다 충동적으로 퇴사했기 때문일까? 후련하기보다는 찝찝하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많고 오히려 손해를 보며 퇴사를 당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과로로 힘들었던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나 좀 더 유리한 시점까지 버텨야 했을까.
고생만 실컷 하고 보상도 없이 애매하게 퇴사하는 것을 나보다 동기들이 안타까워했으니 말이다. 회사와 원룸의 계약 만기일까지 버텨서 실업급여까지 받자고 다짐했건만 어느 순간 눈이 뒤집혀서 퇴사해버렸다. 이미 엎질렀으니 주워 담기는 글렀지만 말이다. 보통의 이성적인 사람들은 여기서 꾹 참고 버티겠지. 분명히 나보다 일찍 퇴사한 동기를 안타깝고 부럽게 생각했다. 조금만 더 같이 버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저렇게 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주 6일에 야근 강요에 하루지만 회사에서 밤을 새워 일한 적도 있다.) 그때도 이미 한계였기 때문에 수틀리면 계획이고 뭐고 퇴사할 수밖에 없겠다고 어느 정도는 예상한 셈이다.
결국 그렇게 되었는데 다만 너무 앞뒤 재보지도 않고 분노 조절에 실패하고 밥 먹여주지 않는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퇴사한 건 내 잘못이다.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잇값을 못했다. 적어도 다음에 계획을 세운다면 구체적인 사항들을 미리 알아둬야겠다. 이를테면 실업급여 수급조건이라든가 월세의 묵시적 갱신이라든가 법적인 기한이나 조건을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하는 거겠지.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는데 정확하게 찾아볼 생각을 안 했으며 실업급여가 얼마인지도 계산하지 않았고 라떼는 분명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이거 단기 계약직이라도 구해서 기어이 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구차하게 굴지 말고 조금 쉬다 다시 취업하는 게 나은지 모르겠다. 밥벌이는 예나 지금이나 귀찮기도 하지. 장기근속이나 정년퇴직이 새삼 굉장한 훈장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평생을 직장에 다니며 일하는지.
아무튼 나는 너무 생각 없이 퇴사해버린 죄로 면목이 없어졌다. 나를 수거하러 오신 부모님 뵐 낯도 없어졌고, 내가 이토록 세상 물정 모르고 어리숙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가시질 않는다. 월세도 관리비도 요금도 꼬박꼬박 냈기에 얼마 되지도 않는 보증금은 쉽게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묵시적 갱신을 대충 검색해보고 말았는데. 나를 학생 또는 아가씨라고 번갈아 부르며 저를 아빠처럼 생각하라던 집주인은 제법 악역다운 대사를 뱉어 나에게 인생의 쓴맛을 알려주었다. 이런 게 인생교육일까. 그렇다면 그 아저씨는 첫 스승이 되겠다. 이런 류의 쓴맛을 본적이 이전까지는 딱히 없었던 것도 같다. 인터넷에서 본 법적인 근거를 말하자 혀를 차며 ‘그건 아가씨 생각이고.’라고 일축했다. 이왕이면 학생이라 불러주면 좋으련만. 역시 학생은 등쳐 먹기엔 미안한 보호 대상이라는 느낌이 강하고 아가씨는 뭐 알 바 아니라는 걸까. 물론 조금 진정하고 나니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한 나의 잘못이고 집주인은 원칙을 고수했거나 혹은 내가 부자를 혐오하여 ‘돈 많으니까 그 정도는 손해도 아니고 내어줄 수 있잖아’라는 억지를 부린 걸 수도 있겠다. 그런 빈자의 사고방식을 싫어했는데 그게 나라니, 몹시 피로하다. 다른 세입자가 내일 방을 보러 온다는데 제발 계약하라고 기도나 해야겠다.
퇴사를 결심하고 가족 구성원에게 일일이 통보하였는데 반응이 정말 주옥같았다. 특히 동생은 듣자마자 ‘언니, 계획은 세웠어?’라고 추궁해서 평소라면 뒤엎을 만한 훈계였으나 이미 기력을 소진하여 화를 낼 힘조차 나지 않았다. 걱정에서 나오는 말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동생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거다. 직업도 천직을 찾아서 잔소리가 심한 동생에게는 맞춤옷처럼 잘 어울리고 그 직종의 사람들은 다 그런가 하는 편견도 얼마큼은 있으며 동생의 후임이 될 사람은 정말 안됐다는 걱정도 든다. 사사건건 숨 쉬듯이 지적질을 하며 부모에게도 잔소리와 훈계를 일삼는 굉장히 피곤한 유형이다. 대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잔소리가 심한 사람은 대개 자신과 다른 타인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아니꼬운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나도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퇴사한 만큼 욱하는 성미라 잔소리가 곡소리가 되도록 화낸 적도 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그래서 계획은 세웠냐고? 삶의 계획을 세워 좋은 점은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계획에서 어긋났는지 맞춰보는 재미가 있다는 정도일까. 내년에는 또 대충 새롭게 일할 계획을 세웠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주식이나 잘 되면 좋겠다. 매일 주식하는 스트레스도 어마어마하다. 쉬워 보이는데 어렵고 간단한 것 같은데 생각대로 안 되어서 짜증이 난다. 빨리 실력이 늘어서 게임처럼 즐기게 되면 좋겠는데 이것 또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되면 좋고, 아님 말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