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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20. 2023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이승우 <이국에서>



이승우 작가의 문장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중 부정을 사용하거나 단어를 풀어헤치는 문장이 많아서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야 한다. 때로는 과도한 말장난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런 문장들을 무의식중에 닮고 싶었던 것인지 요즘 내가 쓰는 글에도 비슷한 문장들이 가끔씩 나오는 것 같다. 물론 닮고 싶다고 해서 따라할 수 있는 문장들이 아니기는 하다.


이번 작품은 '외부인'으로서의 주인공이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찾아 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모시던 정치인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 추악한 정치가 판을 치는 나라를 떠나 머나먼 이국으로 가지만 그 곳 역시도 국가에 의한 공동체적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 곳에 머무르든 이곳 저곳을 떠돌든 간에,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가슴에 크게 와 닿았다.

"남이 원하는 일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일을 해라."


나는 과연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부인'으로서, 자유로이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




정치에 관한 작가의 뼈때리는 문장들이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옮겨 둔다.


"반대파가 있다는 것은 그가 정치인이라는 증거일 뿐,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할 수 없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고, 그리고 정치인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떻게든 헐뜯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한쪽에 있고, 무슨 일을 하든 찬양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다른 쪽에 있다."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했느냐를 먼저 묻고, 그에 따라 반응한다. 판단은 행위의 내용이 아니라 행위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똑같은 일이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이 되거나 불가피한 처신, 심지어 용기 있는 행동이 된다. 사실에 대한 분석과 이해는 빠지고 해석이 앞으로 나온다. 해석이 주관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사실을 바꾼다. 궤변이 이렇게 탄생한다. 그것이 정치의 영역에서 흔하고 당연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어머니가 자신의 몸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 어떤 암시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보다 몇 해 전 수술과 화학요법을 병행하며 치료를 받았지만 물을 마시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의사에 의해 선고된 잔여수명 6개월도 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난 친정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본 경험이 그녀로 하여금 자기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암과의 싸움을 포기하게 했다는 사실도."

- <이국에서> 본문 중에서


소설의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은 참 많이들 아프다. 모두 건강하기만 해서는 이야기가 재미가 없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죽어가야 플롯이 완성될 수 있을 테니까.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이 아플 때, 특히 암에 걸려 죽어갈 때, 나는 직업병처럼 내 환자들을 떠올린다.


암환자를 돌보다가 떠나 보내는 일은 보호자의 몸과 마음을 모두 피폐하게 만든다. 세상에 쉬운 죽음이 어디 있겠냐만 암환자의 마지막이 편안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인지라,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가족들이 나는 혹시 암에 걸리더라도 항암치료고 뭐고 안 받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다가 가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내 환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수술 안 받고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겠다고 하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 환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내 남편이, 친구가, 사촌 동생이, 뒷집 영감이, 사돈의 팔촌이, 수술하고 항암치료 받느라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결국은 죽었는데 나는 그렇게 되기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떠나 보낸 가족을 포함하여 기껏해야 서너 명이 전부일 것이 분명한 그들 주변의 암환자들로부터 얻어진 간접 경험은 일반화시키기에는 너무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실상 그들이 정말로 원하지 않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치료하느라 고통만 받다가 결국은 피할 수 없게 되는 죽음'일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치료란 무릇 고통이 어느 정도 따르기 마련이지만 요즘은 수술 기법이 많이 좋아져서 대장암의 경우 수술 후에도 크게 힘들지 않고 빠르게 회복되는 환자들이 대다수이다. 환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항암치료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것인데 수술 이후의 항암치료야 정 원하지 않으면 안 받으면 된다. (물론 재발의 위험은 올라간다.) 중요한 사실은 원격전이가 있는 환자, 항암치료를 받지 않는 환자까지 전부 포함하더라도 대장암의 5년 생존율은 일단 수술을 받기만 하면 70퍼센트가 넘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수술을 끝까지 받지 않고 버틴다면 5년 생존율은 0으로 수렴할 것이며, 항암치료 여부와 무관하게 암환자의 마지막은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피하고 싶어했던 '고통받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정도로 설명하고 설득하면 대부분은 먹힌다. 사실 '외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러 병원으로 왔다는 것부터가 환자 본인 혹은 보호자에게 치료 의지가 있다는 것일테니 설득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가끔은 실패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승우 작가의 말처럼 해석이 주관의 영역에 머무르지 못하고 사실까지 집어 삼켜 버리는 환자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렇게 설득에 실패해서 발길을 돌린 환자들 중 마음을 고쳐먹고 외래를 재방문하는 환자는 극히 일부이고, 장폐색이나 천공 등의 응급 상황이 생기고 나서야 응급실에서 다시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상당수의 환자들은 첫 외래 진료를 끝으로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아름답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암을 맞이하는 자세는 개개인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해석에 갇혀 의사의 조언을 들으려하지 않는 환자들을 만날 때면 씁쓸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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