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친코>는 재일 한국인(자이니치)의 이야기이다. 고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며 살아야 했던 이방인들의 삶을 재미교포인 작가의 눈으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어두운 부분이 어디 한두 군데이겠냐만, 이민자들의 신산한 삶을 다룬 이야기는 유난히 가슴에 와닿는 것 같다.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이 그랬고, <파친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으며 디아스포라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작품들이 자꾸 오버랩되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인 듯하다.
주인공들의 삶은 결국 '파친코'로 수렴되었다. 한수가 일본에서 성공하게 된 근간도, 선자를 일본으로 불러들인 계기도, 노아의 삶이 비극으로 치달은 이유도, 모자수가 가족의 울타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솔로몬의 마지막 종착지도, 결국은 '파친코'였다. 파친코는 자이니치의 삶이자, 자이니치 그 자체였다. 노아가 자이니치로서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부분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노아의 극단적인 선택이 이해도 공감도 되지 않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결국에는 파친코로 돌아오게 되는 솔로몬의 운명을 보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서 느꼈을 노아의 절망이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었다.
좋은 역사소설이었다.
읽는 내내 돌아가신 큰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나의 큰할아버지는 자이니치였다.
97년 겨울,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가족들이 모두 같이 일본으로 큰할아버지를 뵈러 갔었다. 내 생애 첫 해외 나들이였는데 어찌 안 설렜겠는가. 하지만 일본으로의 여정은 내 기대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비행 스케줄이 엉켜 대구에서 김해공항까지 총알택시를 타야 했고, 난생처음 타본 비행기에서는 창밖을 볼 여유도 없이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니가타 공항에 도착해서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수속을 밟고 착착 입국하는 사이 우리 가족만 입국 심사대에 붙잡혀 심문 아닌 심문을 당해야 했다.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아버지와 한국말을 겨우 몇 마디 할 줄 아는 입국 심사원 사이의 의사소통 과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영어라도 좀 할 줄 아는 누나나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참 좋았겠지만 우리 둘 다 너무 긴장해서 그럴 정신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가 우리말과 한자를 섞어가며 필요한 입국 서류를 겨우 작성하는데 앞에서 한숨을 푹푹 쉬어 대던 입국 심사원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는 우리를 무슨 불법 이민자 취급하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안 좋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냥 우리 때문에 퇴근이 늦어져서 기분이 별로였던 것 같다. 우리가 그날 니가타 공항의 마지막 입국자였다.
마침내 수속을 마치고 들어서니, 저 멀리 홀로 앉아 계시는 한 노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핏줄은 못 속인다고 했던가. 큰할아버지의 얼굴은 아버지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고, 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돌아가셔서 한 번도 뵙지 못한 내 할아버지를 직접 뵌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합실에 혼자 계시기도 했지만, 북적거리는 속에 계셨어도 분명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그날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와 큰할아버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우셨다. 들썩이는 아버지의 등에서 느껴졌던 감정은 분명히 그리움이었다. 아버지께서 할아버지를 여의신 것이 딱 그 당시 내 나이 정도였으니, 삼십 년의 세월 동안 할아버지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겠는가. 반면 큰할아버지에게서 어렴풋이 느껴졌던 감정은 그리움 그 이상이었다. 훗날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것은 회한에 가까운 감정이었을 것 같다. 큰할아버지께서 한국에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신 것이 1950년 무렵이었다고 하는데, 자이니치로 파친코를 운영하면서 일본인 아내를 새로 얻어 자녀와 손주까지 볼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으니, 수십 년 만에 조카를 마주했을 때의 복잡한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눈물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열다섯의 나는 아직 너무 어렸지만 나도 공연히 같이 눈물이 나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마침내 큰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하고 나니, 더욱 엄청난 충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누나가 묵게 될 2층 방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큰할아버지께서 아마도 북한으로 보이는 어떤 장소에서 김일성과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 자이니치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대해 잘 모르던 중학교 2학년의 내가 아무런 사전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김일성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의 혼란스러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큰할아버지께서 조총련에 소속되어 있고 그것이 지난 수십 년간 고국에 한 번도 들르지 못한 이유였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빨갱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며 굴곡진 세월을 견뎌 오셨을 큰할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열다섯의 나는 결코 알지 못했다.
큰할아버지는 다행히도 돌아가시기 전 고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고향으로 돌아와서 수십 년 만에 재회한 한국인 아내의 손을 잡고 환하게 같이 웃으시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