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극한의 선과 악이 공존하는 기묘한 공간.
약간의 나쁜 마음만으로 궁극의 악을 범할 수 있는 곳.
누군가의 희망과 누군가의 절망이 교차하는 장소.
<죽은 자로 하여금>은 내부고발자 무주와 피고발자 이석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다. 병원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작가 스스로가 한 인터뷰에서 '낯선 공간이고 외부에서 실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며, 사회적 윤리를 기대하지만 어느 곳보다 자본주의 논리에 취약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듯이, 작가는 병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정의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자본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묘사한다.
등골 서늘하다. 편혜영 작가의 전작 <홀>이 그랬던 것처럼.
"의사는 절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을 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믿겠어. 얼마 살지 못합니다, 다리를 쓸 수 없습니다, 눈이 안 보일 겁니다, 평생 오줌보를 차야 합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믿을 수 없는 건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의사만큼 악랄한 인간은 없어. 희망으로 병이 낫나. 절망에 빠진 사람한테 돈이나 계속 쏟아부으란 얘기지. 잘 들어둬. 그런 인간한테 속으면 안 돼."
"하지만 그보다 더 못 믿을 건 포기하라는 의사야. 그렇게 말하는 의사는 무능한 거야. 사람이 수학이야? 포기하게...... 무능한 의사보다는 악랄한 의사가 나아. 안 그래?"
- <죽은 자로 하여금> 중에서
마취가 된 채 수술대 위에 전라 상태로 누워 있는 환자를 보며 나는 가끔 생각한다. 저 환자는 무슨 근거로 나를 믿고 몸을 내맡긴 것일까. 내가 선을 행할 것이라고,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잠이 들었을텐데.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내가 절대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속도위반 딱지를 종종 떼이고 길가에 침을 뱉기도 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인간이란 무릇 선과 악의 양면을 모두 지닌 불완전한 존재임을 환자가 인지하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수술할 의사인 내가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하지만 환자의 이런 절대적인 믿음은, 역설적이게도 절대로 환자를 배신할 수 없게 하는 담보로서 작용한다. 비록 항상 완벽하지는 못할지언정, 의도만큼은 선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을 언제나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이것은 환자의 몸에 메스를 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내야 할 마지노선같은 것이다.
병원이라는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과연 선을 행하고 있는지 늘 고민한다.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하지만 나의 최선이 의도와는 다르게 '선'이 아닌 '악'을 낳을 수도 있음을 알기에 매순간 겸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