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는 슬픈 병이다. 단순히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주변인에 의지하게 되니 종국에는 수십 년에 걸쳐 단단하게 쌓아 온 자아가 허물어지고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마에 대한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쓴 김영하 작가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치매는 과거를 잊어버리는 병이 아니라 미래가 없어지는 병이다'라고 하기도 했는데 치매라는 병의 본질을 상당히 날카롭게 꿰뚫은 말인 것 같다.
치매는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기도 하거니와 '기억의 상실'이라는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질병의 특성상 가족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돌봄, 의료를 비롯한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투영하는 데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소설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의 소재로 흔히 등장한다. 가와무라 겐키의 소설 <백화> 역시 치매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주인공 아들과 어머니는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일정 거리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들 사이의 애증의 관계가 어머니의 치매 진단 이후에 서서히 풀어져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다. 감정선을 크게 건드리지는 않지만,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소재를 담백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오히려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는 당시에 번번이 전화를 걸었다. 용건을 물으면 불분명한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미안, 지금 바빠서, 하고 강제로 전화를 끊었다. 전철로 1시간 반 떨어진 거리에 살면서 만나러 가지도 않았다.
(중략)
앞으로 다섯 달이면 아이가 태어난다.
인생은 그렇게 밀려난다."
- <백화> 중에서
'인생은 그렇게 밀려난다'라.
슬프지만, 진실이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엊그제까지도 업고 다녔던 것 같은 아들 녀석이 어느새 덩치가 엄마만 해졌다. 그리고, 그 세월만큼 어른들의 인생은 밀려난다. 나도, 아내도,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우리 엄마 – ‘어머니’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엄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는 예나 지금이나 여장부 스타일이다. 매사 긍정적이시고 어딜 가든 특유의 친화력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다음 그 조직의 핵심 멤버로 자리 잡으시곤 한다. MBTI를 따지면 ‘I’에 훨씬 가까운 편인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엄마는 내가 중고등학생일 때부터 여러 곳에 봉사활동을 다니셨는데 이것도 그냥 대충 적당히 하신 것이 아니라 대구동구자원봉사센터 이사장까지 역임하실 정도로 열성이셨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사회봉사유공 국무총리 표창과 대구자원봉사대상을 받기도 하셨으니 객관적으로 보아도 대단하신 분인 게 확실하다.
얼마 전 엄마가 동화사 자원봉사단장 자격으로 동화사 주지스님을 모시고 신도 수백 명과 함께 인도로 성지순례를 다녀올 일이 있었다. 매사 미리 걱정해 봐야 소용없다는 주의를 가지신 분인 데다 평소 건강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잘 다녀오시리라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엄마는 연세가 일흔이 가까워오니 해외여행을, 그것도 인도로 성지순례를 가신다는 것이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지셨나 보다. 출발하기 전부터 전에 없이 이런저런 걱정을 늘어놓으셨다. 버스를 일고여덟 시간씩 탄다는데 멀미는 어떻게 하느냐, 최근 들어 허리랑 무릎이 영 안 좋은데 걷는 데 지장은 없겠느냐, 향신료 냄새는 질색인데 음식은 어떻게 하느냐, 등등.
“멀미약 꼭 챙겨 가시고 버스 맨 앞에 앉으시고요, 평소 다니던 정형외과에서 진통소염제 넉넉히 처방받아 가시고요, 음식은 요리사가 같이 간다면서 무슨 걱정이에요. 갔다 오시고 나면 내가 왜 이런 걱정을 미리 했나 싶으실 거예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내가 이런 말로 안심을 시키려 노력하는 대상이 우리 엄마라는 사실이 새삼 어색했다.
“아들, 엄마도 어쩔 수 없이 늙어지는 것 같아 서글픈 생각이 자꾸 들어.”
나는 그 말에서 이제는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작아지기 시작하는 엄마가 느껴져 슬펐다.
(비상약을 잔뜩 챙겨 갔다가 그대로 가지고 아무 일 없이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신 엄마는 앞으로도 십 년은 거뜬하겠다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기가 살아나셨다.)
얼마 전 부모님께서 건강검진을 받으셨다. 아버지께서 가벼운 당뇨와 고지혈증이 있으시기는 했지만 평소 건강을 자신하시던 분들인데 아버지 cardiac CT에서 관상동맥 하나가 좁아진 소견이 확인되었다. 다행히 심장초음파와 운동부하검사에서는 특이 소견이 없어서 정기적인 추적 관찰만 하기로 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의사들은 환자 보느라 바쁘다. 그러다 보면 내 가족의 건강은 뒷전이 되기 일쑤다. 평소 건강하셨는데 설마 우리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사 가족이라고 안 아픈 것이 아니다. 내가 의사인데 내 가족의 건강을 내가 챙기지 못하다가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그 파장은 의사가 아닌 일반인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병원 일에 치여 가족들을 살피지 못하다가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하는 주변 동료들을 보면서도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반성하고 이제부터라도 좀 더 가까이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밀려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하지만 부모님의 인생이 최대한 나에게서 멀리 밀려나지 않도록 손을 잡아 드릴 수는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