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꼭 너같은 딸 낳아봐라"는 악담아닌 악담을 듣지 않고 자라지 않은 딸이 있을까.
세월이 흘러흘러 예언이 적중(?)하여, 나는 꼭 나같은 딸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한 딸을 낳게 되었다. 그리하여 밤마다 '오, 신은 사춘기라는 것을 왜 주셨을까' 가슴을 쥐어뜯으며 잠을 청하게 된 것이다. 역시 내가 옛날에 그렇게 말을 안들어서 그 예언이 현실화된 것일까? 지금 나는 벌을 받는 것일까?
지금까지는 엄청난 실패없이 어찌어찌 괜찮은 듯 해보였던 나의 인생은 아이들의 사춘기를 맞닥뜨릴 때마다 무릎을 꿇었다. 나와 다른 아들이어서 힘들고, 같은 딸이어서 고통스러웠다. 혼자 회유도 해보고, 협박도 해보고, 그저 체념도 해봤지만 사춘기가 호락호락 지나가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이제부터는 사춘기와 함께 가는 거다.
아이를 둘 키워보니 어떤 기질같은 것은 이미 타고나서, 이쪽 길에서 저쪽 길로 억지로 떠밀고 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기억나는 것 딱 한 개만 꼽자면 첫째아이는 아기때부터 싸움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여서, 말도 못할 때 간 키즈카페에서 한 아이가 자꾸 놀던 장난감을 빼앗아가자 다음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장난감을 자발적으로 그 아이에게 건넸다. 둘째아이는 키가 내 무릎만큼 오던 때부터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있으면 손바닥만한 자기 무릎에 누우라고 내 머리를 끌었다. 첫째아이에게 살가운 정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한번도 집에서 큰 소리를 낸 적이 없고, 둘째아이는 먼저 다가와 이것저것 챙겨주고 돌봐주지만 자기주장이 강해 집안의 트러블메이커이기도 하다.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환경 자체도 부모의 양육방식이 크다고 본다면, 사실 지금은 거의 선천적 기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생각에 이끌리고 있다.
그렇다면, '꼭 너같은 딸 낳아보라'는 말은 악담이나 예언이라기 보다는 그저 자연의 섭리 아닌가?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당연한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우주적 필연으로서. 엄마는 엄마와 같은 딸을 낳았고 그 딸은 또 자신같은 딸을 낳았다. 그저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이 말이 된다면.)
영화 '은교'에서도 인용된, 시인 로스케의 '젊음이 너의 상이 아니듯 늙음도 나의 벌이 아니'라는 말처럼 사춘기는 나의 벌이 아니고, 나같은 딸은 나의 벌이 아니다. '계획대로'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