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꼭 너같은 딸 낳아봐라"는 악담아닌 악담을 듣지 않고 자라지 않은 딸이 있을까?
세월이 흘러흘러 예언이 적중(?)하여, 나는 꼭 나같은 딸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한 딸을 낳게 되었다. 그리하여 밤마다 '오, 신은 사춘기라는 것을 왜 주셨을까'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흘리며 잠을 청하게 된 것이다. 역시 내가 옛날에 그렇게 말을 안들어서 그 예언이 현실화된 것일까? 지금 나는 벌을 받는 것일까?
어느 날 아침, 둘째의 아기티가 남아있는 잠든 얼굴을 훔쳐 보다가 깨우면서 종아리뒤의 빨간 자국들을 발견하고 내도 모르게 "아이고, 모기한테 물렸나? 어젯밤 내 방에 있던 모기가 어디로 갔나했더니.." 줄줄 읇는 나를 보고 문득 놀랐다. 이 말은, 여름마다 내가 엄마에게 늘 듣던 말 아닌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래서 나는, 강산이 네 번 바뀌거나 그전에 네번, 또 그전에 열번 바뀐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고작 여기까지 오게 될 필연이었음을 깨닫는다. 자고 나면 또 조금씩 자라있는 아이의 얼굴을 그 어떤 보고서의 오타를 찾아내듯 바라보는 일들도. 엄마가 그렇게 나를 보던 일들에 숨막혔던 기억도. 이건 모두, 우주의 섭리였던 것이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몇 광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을. 수십년이 지나 나도 내 엄마처럼, 내 아이가 밤새 작디 작을지 몰라도 그 천하에 몹쓸 모기에 물려서 가려울까봐 마음쓰는 일들은. 그건 세상의 모든 걱정중에 변함없을 걱정중 하나이므로, 나도 엄마처럼, 또 그 엄마의 엄마처럼.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고민들과 두려움들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고, '꼭 나같은 딸'을 낳는 일이 저주가 아니라 그저 신의 섭리일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를 둘 키워보니 어떤 기질같은 것은 이미 타고나서, 이쪽 길에서 저쪽 길로 억지로 떠밀고 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아이는 아기때부터 싸움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여서, 말도 못할 때 간 키즈카페에서 한 아이가 자꾸 놀던 장난감을 빼앗아가자 다음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장난감을 자발적으로 그 아이에게 건넸다. 둘째아이는 키가 내 무릎만큼 오던 때부터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있으면 손바닥만한 자기 무릎에 누우라고 내 머리를 끌었다. 첫째아이에게 살가운 정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한번도 집에서 큰 소리를 낸 적이 없고, 둘째아이는 먼저 다가와 이것저것 챙겨주고 돌봐주지만 자기주장이 강해 집안의 트러블메이커이기도 하다.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환경 자체도 부모의 양육방식이 크다고 본다면, 그리고 그 부모의 양육방식이라는 것도 많은 기질적 대물림이라고 본다면, 사실 우리 아이들은 콩 심어서 콩이 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꼭 너같은 딸 낳아보라'는 말은 악담이나 엄청난 예언이라기 보다는 그저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배나무에 배나지 감안열리고, 아보카도 심은데서 아보카도 나온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자연스러운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우주적 필연으로서. 엄마는 엄마와 같은 딸을 낳았고 그 딸은 또 자신같은 딸을 낳았다. 그저 지극히 순리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 '은교'에서도 인용된, 시인 로스케의 '젊음이 너의 상이 아니듯 늙음도 나의 벌이 아니'라는 말처럼 사춘기는 나의 벌이 아니고, 나같은 딸은 나의 벌이 아니다. '계획대로'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