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망버드 Oct 30. 2022

삐, 구춘기입니다

어릴 때부터의 나의 로망, 도서관에서 일을 하려면 사서 자격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나는 요즘 자격증을 따기 위해 교육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코로나 3년을 거쳐 근 7년여만에 세상밖으로 나온 셈이다. 쓸고 닦고 씻고 널고, 창밖을 바라보기만 하던 단조로운 일상에 갑자기 시간왜곡이 생긴 듯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다. 입시 기차보다 더 빠른 기차에 올라탄 느낌이다. 

맨 처음에는, 평소에는 통 사용할 일이 없던 텀블러를 들고 새 펜과 형광펜을 필통에 넣고 비록 아이가 중학교때 쓰던 책가방이지만 가방을 메고 가서 나무가 가득한 캠퍼스 교정을 걸어가 책상에 앉아있는 기분이 좋았다. 무거운 책들과 노트를 넣는 기분도 좋았다. 거기까지였다. 매일 아이들의 저녁을 준비해놓고 1시간 거리를 가야했다. 거기다, 시험을 본단다. 정말 오랜 시간만에 시험이라는 것을 보기 위한 책을 펼친 지 몇분 안되서, 나는 옛날의 나의 두뇌에 대해 매우 관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와 다르게 집중력도 약하고 엄청나게 산만했다. 말하자면 나는 이미 도수가 다른 현실의 안경을 쓰고 굴절된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나는 아이들에게 시험에 대해서 말을 조심하기로 한다. 특히 시험보고 온 날, '시험 잘 봤어? 잘 봤겠지?' 란 말, 그리고 못봤다는 말에 '잘 봤겠지 뭐. 어려웠다면, 다른 아이들도 어려웠을거야.'라는 말들조차, 절대 하지 않기로. 거꾸로 내가 들어보니 아무런 도움도 안되고 부담만 되는 말이었다. 실제로 겪어보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동안 했던 말들을, 다 주워담고 싶다. 비단 이 말 뿐이랴.


삐, 구춘기입니다.

아마도 어딘가 이런 진단명이 있을 것이다. 사춘기와 오춘기가 만난, 구춘기네요. 별다른 약은 없구요, 그냥 내버려두면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수술이나 약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무리하게 수술을 하거나 안맞는 약을 쓰다가는 조금 힘들 수 있습니다.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구요. 구춘기 환자분 모두요.


아이들때문에, '너 때문에 못살겠다!! 이렇게 된 게 다 너희들 때문이다!!' 고 소리치고,의무감,책임감때문에 산다고 하소연하긴 해도 사소한 챙김들이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일을 반복하는 일상도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일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주는 것, 받는 것이 삶을 버티게 한다. 사랑의 황홀경이 아니라 돌보고 돌봄받는 의무,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한다. 그것이 우리를 오리엔탈 만다린 호텔에서 뛰어내리지 않게 한다. 만우절처럼 이렇게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다고 해도. 잔소리하고 잔소리듣고, 빗방울에도 맞아 죽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빗방울에도 맞아 죽을까 걱정하는 내 마음이 나를,우리를 살게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그저 보컬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와 내 말을 너무 안듣는 것같은 아이를 반기며 쌀을 씻는다. 그저 '빠져있는 것'에 '완벽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사랑의 실험을 지속하기 위해서.



작가의 이전글 나만의 직업, 나라는 직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