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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Mar 12. 2020

이 와중에 영화

창조적 일상을 위해,란 말이 있던데

나는 무려 창조적 로맨스를 위해 (아니 로맨스적 창조인가?) 어젯밤 영화를 보았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을지 모르는, 세번째 보는 비포선라이즈를. 어떤 영화든 그렇겠지만 같은 영화라도 20대, 30대, 40대에 보는 느낌은 달랐다. 

20대엔 두 사람의 극적인 상황,30대에는 두 사람의 끊임없는 대화에 집중했던 것 같은데, 40대에 보는 지금은 그저 두 사람을 둘러싼 배경을 보고 있었다.

20대에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땐 그 극적이고 모험적인 만남과 이별에 집중해서 봤다면 30대에 본 그들은 왜 그렇게 말이 많던지.

그러다, 어젠 깨달았다. 사랑이란, 함께 있기 위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관계라는 걸.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 말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래서 난 줄곧 그들 뒤의 배경을 즐길 수 있게 된 거라는 걸. 그리고 또 그들이 아침햇살속에서 헤어질때, 나는 아침이 와도 헤어지지 않을 사람이 있다는 걸  오래 잊고 있었다는 것도. 함께 있고 싶어서 아무 얘기나 하지 않아도 약속된 사람이.

(사족이지만, 충동적이며 미숙하며 상처받기 쉬워보이는 젊음을 연기하는데 젊은 에단호크보다 어울리는 배우는 없는 것 같다.)


사실 외부요인 때문이긴 하지만 이토록 오래도록 아이들과 오랜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낸 적은,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 말고는 없었다. 두 아이 모두 겨울에 낳아 유난히 몇 달 동안 집에만 있어야 했을 때, 난 늘 창살없는 감옥 운운했었다. 벚꽃 필 즈음이 아이 백일과 늘 맞물려서 그 날이 첫 바깥외출이 되곤 했다. 창밖만 바라보며 벚꽃이 피기를 그렇게 고대했었는데, 그 따뜻한 봄은 쉽게 오지 않았던 기억.  어쨌든 그렇게 함께 같은 공간에서 오래 있을 때, 나와 아이는, 우리는 격의 없고 더없이 충실했었다. 

그 시간 후 실로 정말 오랫만에, 또다시 이런 시간이 와서  창살없는 감옥 운운하던 시간이 얼마간 지났는데, 나는 싫든 좋든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든 해방시키는 것이었든 바로 그 칸막이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가족간에도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어떤 그 거리랄까. 사회적 거리를 두면서 가족간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워진다. 그렇다고 이상적인 친밀함 같은 것은 아닌, 무리하는 노력이 아닌, 물에 밥을 말아먹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이런 관계는 이같은 극한 상황만이 가능케하는 것이었다. 

일상에서 멀리 벗어나지도 못하는 짧은 여행이나, 더없는 절차를 테스트하고 돌아오는 듯한  어중간한 길이의 여행이나,일상과 비일상 그 어디쯤 애매한 성격을 띠는 (종종 빠른 일상 복귀를 희구하는) 방학으로는, 우리는 절대로 이 정도로 정확히는 마주할수가 없던 가족의 맨 얼굴 그리고 곧 우리의 맨 얼굴을, 이제 세숫물처럼 말갛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매끼 같이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시간이 쌓이고 언젠가 시간이 많이 지나있음을 알게 될 그 때, 

공들여 공들여 청소를 하고 창밖에 벚꽃이 하얗게 필 그 때까지, 우리만의 독립영화같은 심심한 영화를 매일 찍으며 기다려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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