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by 연이

머리를 감고 보니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다.

벌써 나도 그럴 나이가 돼버린 건지 예전에 언니들이 염색하기 귀찮다고 했던

말들이 이제 알 것 같다. 평상시에는 굳이 염색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생각하다가도

집안에 경조사가 있다거나 외출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염색약을

사고 귀찮다 구시렁거리며 화장실로 자리를 옮긴다.

남편은 염색약으로 뒤덮인 나의 머리를 볼 때면 뭐 하러 그런 수고를 하냐 한다.

주름이 지건 하얀 머리카락이 보이건 있는 그대로의 당신으로 살라한다. 보이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말은 하지만 정작 나도 보이는 겉모습을 의식하는 가 보다.


돌아가신 아빠는 언제부터인지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을 염색하지 않으셨다.

검은 머리카락 하나 없는 하얀 머리 그 모습도 멋쟁이 할아버지 같아 보이긴

했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는 아빠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친정에 가면 아빠에게 염색을 하라고 잔소리를 하고 아빠의 대답은 귀찮아 한마디였다.

내가 해주겠노라 하면 또 다른 싫다 대답뿐이다.

아빠는 5남 2녀의 장남이셨지만 서울에 자리를 잡았기에 서울이 싫다는 할머니는

삼촌과 함께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시면서 지내셨다. 그러니 아빠의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퇴직을 하고서야 할머니를 모실 수 있었다.


할머니와 시간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치매를 앓고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번씩 낯설게 쳐다보는 할머니의 시선을 바라보며 내가 누군지 묻고 또 물었다.

어느 날 저녁에는 할머니와 10원짜리 민화투 놀이를 하기도 했다. 같은 그림을 찾고

약이 왜 그리 많은지 비약을 했느니 청단을 했느니 홍단을 했느니 할머니의 계산은

무지 빠르다. 광은 한 장의 20점 열 끝은 10점 띠는 5점 할머니가 이긴 것 같으면

우리는 할머니를 사이에 두고 화투장을 숨기기 급급했고 할머니는 누굴 속이냐는

듯이 눈을 흘기시며 본인의 화투를 감추곤 하셨다.

화투가 지루할 때쯤이면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라면을 함께 먹기도 했다.

할머니는 이름 모를 라면을 사발라면이라 불렀고 그걸 제일 좋아하셨다. 친정에 한 번씩

갈 때면 나는 사발라면을 몇 개씩 사가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할머니와

짧지만 확실한 시간의 추억을 만들었다.

치매로 인해 기억력이 잠깐씩 외출했다 돌아오기도 하지만 그런 할머니가 가끔은

귀엽기도 아기 같기도 했다.

어느 주말 오후 아빠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놓고 앉아 검은색 염색약을 꼼꼼하게

바르고 계셨다. 너무 어두운 게 아니냐는 말에 이 정도가 딱 좋다 하신다.

그렇게 부지런히 염색을 하셨던 아빠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젊게 보이는 걸 포기하셨다.

아빠가 염색을 더 이상 하지 않은 이유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첫 제삿날 술을 한잔하시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자식이 부모보다 늙어 보이는 게 불효 같아서 염색을

하신 거라고 그게 효도라 생각했다 한다. 가끔 할머니가 아빠의 머리를 보면서 언제 저렇게

머리가 하얗게 세었냐고 묻곤 했지만 그럴 때면 아빠는 웃으며 “내 나이가 몇인데”라고 짧은 답을 했다.

할머니 눈에는 환갑이 넘은 아들도 젊은 청년으로 보이셨나 보다.


오늘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엄마 아빠가 했던 것처럼 보자기를 덮어쓰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정성스레 빗질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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