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김장 할인행사에 응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여해 주신 응모권이 당첨되어 동치미 3kg을 증정해 드리고자 하니 이번 달까지 매장에 방문하셔서 경품 수령하시기 바랍니다. -
농협 로컬푸드 매장에서 가끔 찬거리를 사러 들르곤 했었는데 마침 김장 할인 행사를 진행 중이었고 나는 필요한 채소를 몇 가지 구입하고 응모권 한 장을 받았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내심 기대를 담아 안쪽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추첨이 되면 문자로 알려준다 했으나 까마득히 잊고 지냈었다.
동치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삶은 고구마다. 겨울밤은 길었다. 자기 전에 배는 왜 그리 출출한 건지, 그럴 때면 엄마는 간식으로 삶아 놓은 고구마를 큰 쟁반에 담아 오시곤 했다. 고구마는 목이 메일 정도로 크게 한입 베어 물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았다. 또 하나 항아리에서 바로 꺼내온 김장 김치를 손으로 쭉쭉 찢어서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씹어 고구마와 먹어야 제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동치미를 그릇째 들고 꿀꺽꿀꺽 마시면 입안에 남아있던 고구마와 동치미 국물이 함께 시원하게 쓸려 내려간다. 가끔은 동동 띄워진 얼음도 와그작 와그작 깨물어먹는다. 속이 뻥 뚫리는 게 없던 체증도 싹 내려가게 하는 동치미는 천연 소화제이다.
어릴 적 겨울이 다가오기 전 어른들은 겨울 준비로 바빴다. 일 년 먹을 김장김치에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야 하는 필수품인 연탄을 들이는 것이다. 보일러가 귀했던 시절이라 집집마다 연탄광에는 적게는 몇 백 장에서 많게는 몇 천 장까지 겨우살이를 준비했었다. 그 덕에 우리 집은 아랫목이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큰일 하나를 끝내서일까? 엄마는 한 줄로 높게 쌓여있는 연탄을 보고 있으면 조급했던 마음이 한시름 놓인다는 말씀을 하셨다. 덕분에 친구들과 놀다 들어와 꽁꽁 언 손을 녹이려 이불이 깔려있는 아랫목에 손을 넣고는 따뜻함에 몸이 나른해지면서 이불속으로 똬리를 틀고 누워 잠이 들기도 했었다
연탄불이 꺼지지 않게 자주 확인을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날 저녁은 냉골에서 잠을 자야 한다. 엄마는 새벽녘에 한 번씩 일어나 연탄불을 갈고 들어오신다. 이런 엄마의 수고가 있기에 우리는 밤새 따뜻한 방바닥에서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빨간 담요를 덮고 깊은 잠을 잔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다. 자는 나를 누군가 다급히 깨우는 소리에 눈은 떴지만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고 자꾸만 주위가 빙빙 도는 것 같아 다시 이불 위로 쓰려졌다. 혼자서는 걸을 수조차 없는 나를 언니와 오빠가 일으켜 겨우 밖으로 데리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날이 우리 가족 연탄가스를 마신 날이었다.
언니가 앉혀준 그대로 나는 내복만 입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도 춥게 느껴지질 않았다. 그냥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워 울기부터 했던 것 같다. 아마 엄마에게 내가 아프니 빨리 와서 알아달라는 어리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허둥지둥 장독대로 올라가더니 작은 항아리 뚜껑을 열어 손을 넣고는 바가지에 무언가 담고 계셨다.
언니 오빠들보다 울고 있는 나에게 달려와서는 “이거 얼른 마셔”라며 바가지를 입에 대주셨다. 빨간 바가지 안에는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차가운 동치미 국물이 있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그릇이 아닌 빨간 바가지였을까. 토할 것 같아 먹기 싫다는 나에게 연탄가스 맡았을 때에는 동치미 국물을 마셔야 한다며 기필코 마시라 했다. 한 모금 입에 물고는 짜다며 인상을 쓰고 차갑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두어 모금 더 마시자 울렁거림이 잦아들었고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통했던 건지 다행히 응급실에는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 동치미 한 그릇이 우리 가족에게 처방받은 치료약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부터는 제대로 된 동치미와 김장김치를 맛보기가 어려웠다. 엄마의 맛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이벤트 응모를 하고 당첨이 돼서 동치미 한 그릇을 식탁에 올리니 다시 예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날 새벽녘 병원에 가지 않고 왜 동치미였을까? 동치미가 만병통치약도 아닌데 멀미를해도 연탄가스를 마셔도 속이 더부룩해도 동치미 국물만 마시면 되었으니 말이다.
요즘 우리 집 밥상이 단출하다. 김치에 동치미 한 그릇, 소박하지만 나의 추억이 차려 놓은 진수성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