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백록

by 성휘

오직 바람만 깨어있던 시간에 길을 나섰다. 냉기가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껴입은 옷 덕에 몸은 푸근한 채였다. 기분이 좋았다.


초입부터 백(白)이었다. 눈은 어렴풋 길만 남겨둔 채 모든 걸 지웠다. 어렴풋한 길은 그래서 더 선명했다. 다리와 허리 근육이 팽팽해졌다. 후-후-하고 허파를 이완했다.


소리는 낮게 깔렸다. 눈보다 밑으로 내렸다. 들리는 건 눈 밟는 소리와 간혹 하늘에 획 하고 한 획 그어대는 까마귀 울음이 전부였다.


백으로 현현한 세상에 오직 나만 흑이었다. 흰 배경에 찍힌 작고 까만 점으로 세상 모든 고요가 몰려들었다.


태양이 깨어났다. 문득 사방이 눈꽃이었다. 정수리 위에도, 어깨죽지에도, 정강이 어귀에도 눈꽃이 폈다. 낮게 핀 눈꽃은 나보다 앞서 눈길을 부시고 간 사람들로 지워져있었다. 눈꽃이 떨어진 가지엔 예의 초록이나 황색 따위가 피어났다. 나는 그저 낙화한 흔적만 보고 걸으면 되었다. 퍽 안심했다.나도 어깨, 모자, 장갑으로 꽃 여럿을 떨궜다.


백이 산란해대는 광(光)에 익숙해질 때쯤 나무는 낮아졌다. 낮아진 나무만큼 바람이 설쳐댔다. 혹여 나무가 더 자랄까 맹렬히 나무 정수리들을 후려쳐댔다.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나무가 울었다. 꽝꽝 얼어붙은 쇠붙이마냥 우-하고 언 몸을 떨어댔다. 꽝꽝 언 울음은 멀리서 왔다 멀리로 갔다. 아빠의 울음이었다.


부푼 다리 주무르며 얼마즈음 올랐을까. 돌연 귀(鬼)같은 바람이 불어쳤다. 바람이 길과 하늘 경계를 지웠다. 눈 알갱이가 벌침처럼 얼굴을 쏘아대는 통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저 길이 된 하늘, 하늘이 된 길 속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백록은 느닷없이 현현했다. 나보다 앞서 눈을 밟았던 이들은 귀풍 속에서도 백록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증기에 긴장한 목근육이 풀어졌다.


산능성이를 타고 올라온 바람이 백록에 고였다 이내 솟구쳐올랐다. 바람 위에 바람이 쌓이고, 쌓였던 바람이 다시 낙뢰처럼 내리쳤다. 바람 옆에 또 바람이어서,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었다. 켜켜히 쌓인 바람 피할 길 없어 그저 온 몸으로 받아내니, 내 몸에서 눈꽃이 피어났다. 땀에 젖은 머리칼과 눈썹과 속눈썹에 하얀 설탕 같은 눈꽃이 돋았다.


속눈썹에 쌓인 눈을 비벼댄 통에 감았다 뜨면 무지개가 현현했다. 눈꽃의 잔상인 걸 알았지만 애써 고개를 흔들어대진 않았다. 백록은 백(白)이 아니었다.


귀로는 수월했다. 눈꽃 내렸다 사라진 눈꺼풀 덕에 꼭 펑펑 운 것 마냥 속눈썹은 끈적였고, 훌쩍이는 코에 발갛게 달아오른 눈썹은 더더욱 속 시원하게 엉엉 운 지난 날 같았다.


올라갈 때와 달리 산 밑 눈들은 예의 그 백(白)이 아니었다. 천장까지 기어올라간 해 덕에 얇게 녹아 흙빛을 빨아올렸다. 눈빛은 점점 탁해졌고 그만큼 마음도 어지러웠다. 잠시 떠났던 고민과 잡념이 흰 배경 속 까만 점으로 맹렬히 몰려들었다.


나는 예의 내가 됐고, 백록은 늘 그렇듯 열심히 바람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