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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Mar 18. 2021

엄마의 기도, 나의 기도

엄마는 늘 기도하셨다.

엄마의 손에는 늘 묵주가 있었다. 엄마의 옷 주머니에도, 식탁에도, 소파 팔걸이에도, 침대 머리맡에도, 엄마의 주변에는 늘 묵주가 있었다. 엄마의 핸드폰에는 기도시간 알람이 설정되어 있었고, 핸드폰 알람이 울리면, 엄마는 늘 그 자리에서 묵주를 찾아 기도하셨다.

엄마의 기도 지향에는 당연히 우리 4남매가 있었다. 엄마의 자녀들, 엄마의 엄마와 아버지, 살아있는 형제들, 먼저 하늘로 간 형제들, 특별히 기도를 청하는 지인들, 지인의 자녀들이 엄마의 기도 지향엔 늘 있었다. 그들의 건강과 평화, 때때로 취업이 잘되기를, 하는 일이 잘 되기를, 시험에 합격하기를, 등등의 구체적인 지향도 들어갔으리라. 그런 바람들을 담아 엄마는 늘 기도하셨다. 본인이 머리를 빡빡 밀고 유방암 투병 중일 때에도, 손발이 너무 저리고 소화가 안되어 잠을 잘 수 없는 밤에도, 골수검사 날짜를 잡아놓았던 그 날에도, 백혈병을 진단받았던 날에도, 백혈병 투병 중에도, 밥을 몇 숟가락 못 넘길 만큼 위독해지셨을 때도, 선종하시기 일주일 전쯤까지도, 어쩌면 숨이 넘어가던 그 순간에도, 엄마는 늘, 매 순간 기도하셨다. 환희와 고통, 절망, 두려움, 기쁨과 설렘, 그 모든 순간에 엄마는 기도하셨다.     

 

우리 4남매는 그다지 크게 입신양명하여 대성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우리가 이만큼, 밥 벌어먹고, 제 살길 찾아 일하고, 딱히 아픈 곳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은, 모두 엄마의 기도 덕이다. 나는, 그리고 적어도 나의 둘째 언니는, 이 생각을 강하게 확신한다.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은 모두 엄마의 기도 덕이다. 엄마가 가끔 쓰던 표현대로, 말만 한 딸년 셋을 데리고 여자 혼자 장사를 하면서 살아가던 그 시간들 동안, 그래도 우리가 어디 가서 능욕당하지 않고, 대학 가고, 시집가고, 돈벌이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기도, 신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맞다. 그렇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둘째 언니가 중학생이고, 첫째 언니가 고등학생일 때, 우리는, 주인집 안채와 마당을 끼고 떨어져 있는 작은 월세방에 산적이 있다. 그 주인집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셨고, 가끔 술 처먹고 들어와 마당에 있는 세숫대야를 발로 차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쌍욕을 해대던 몹쓸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가끔, 우리 집 문틈으로 언니들을 훔쳐봤었다. 청소년이 되어 여성의 몸이 되어가는 나의 언니들을 훔쳐보았다. 창문 틈에서 날쌔게 움직이던 그 아저씨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다행히도, 참으로 다행히도, 그 주인집 아들은 훔쳐보기만 했었다. 더한 행동을 할 만한 깜냥은 되지 못했나 보다. 그가 더한 행동을 할 깜냥이 되기 전에, 엄마는 서둘러 이사를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엄마의 나이, 고작 42살이었다. 엄마라고 어찌 무섭지 않았으랴. 다 늙은 부모에게 쌍욕을 해대는 그 아들이 그 다음에는 어떤 짓을 할지, 상상하기도 싫다. 우리가 그 집에서 고작 6개월쯤 살았었는데, 그 기억은 나와 언니들 모두에게, 큰 공포였고, 지금까지도 트라우마가 되어 남아있다.


엄마는 그 시절에도 매일 기도하셨다. 그 집에서 이사하여 문이 잘 잠기고, 창문도 잘 잠기고, 욕실도 집안에 있는 깨끗한 집으로 이사한 후에도 엄마는 늘 기도하셨다. 엄마의 멈춘 적 없는 기도 덕에, 우리는 안전하게 성인이 되었고, 결혼을 했고, 멀쩡히 잘 살고 있다.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난 후, 100일 탈상을 마칠 때까지, 나는 엄마를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쳤다. 가끔 펑크가 나는 날도 있었지만, 매일 기도하려고 애썼다. 엄마의 손때 묻은 기도 책으로, 엄마의 손을 타 색이 바랜 묵주 알을 굴리며, 엄마의 안식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가 나에게 위안이 되기도 했다. 미안한 마음, 아쉬운 마음, 죄책감과 불안을 달랠 수 있었다. 기도 지향에는 엄마의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나의 기도를 통해 속죄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생각해보니, 나는 과연, 엄마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었나 싶다. 엄마 손잡고 5살에 세례를 받았고, 초등부, 중고등부 주일학교를 다녔고, 청년 활동도 하였으나, 나는 엄마처럼 매일매일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는, 신실한 신자는 못되었다. 어쩌다 바랄 것이 생기면, 그때 잠깐 며칠 기도하고 마는 게 다였다. 그나마 결혼 전 레지오 활동을 하던 2~3년 동안은 기도하는 삶을 사려고 애썼으나, 순수한 기도는 아니었다. 그저 기도 모임 중에 하는 기도, 활동 보고를 위한 기도, 단원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기도, 가 더 많았다. 엄마가 아플 때에도, 흔들리는 원망의 마음이 넘쳐 꾸준히 기도하지 못했다. 마음이 어지럽고 번다하여, 늘 주변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기만 했을 뿐, 자리 잡고 앉아 차분히 기도하지 못했다. 나의 신심이 부족했으리라. 겉으로만 신앙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엄마를 위한 기도를 엄마가 떠난 뒤에야 하게 되었다. 엄마의 생전에, 엄마를 위해 기도할걸, 가끔이라도 엄마와 함께 기도할걸, 엄마의 기도 지향을 나눠서, 나도 함께 바쳐드릴걸, 이제야 하는 후회가 무슨 소용이랴만은, 이제라도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엄마를 위한 기도를 이제야 바친다.   

  

기도를 하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이가 없구나. 우리 4남매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이가 이제는 없구나. 엄마가 늘 우리를 위해 기도했었는데, 그 기도 덕에, 우리가 이만큼 살아내고 있었는데, 이제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이가 없.구.나. 이 지구 상에,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줄 이가, 아무도 없구나. 엄마의 부재가 다시 한번, 내 마음에 회오리쳤다. 아무런 조건없이, 사심없이, 그저 나의 잘됨을, 나의 편안을 위해 기도해줄이가 없음이, 갑자기 망망대해에 혼자 버려진거 마냥, 쿵. 하고 마음이 무너졌다.


아니지,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성모님 옆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겠지, 더 많이, 더 충만히, 기도하고 계시겠지. 나는 이곳에서 엄마의 기도를 이어가야지. 내가 나를 위해 기도해야지. 나와 나의 남편, 나의 형제자매들, 그 가정들을 위해, 내가 기도해야지. 기도해야지. 나는 무너진 마음을 다잡아 본다.


엄마. 우리 걱정은 하지 마. 엄마만큼은 아니어도, 내가 엄마를 대신해, 엄마의 기도를 이어갈게.

모두 건강하길, 모두 안전하길, 다치지 않길, 다쳐도 이겨낼 수 있길, 엄마를 생각하며 늘 바르게 살 수 있길, 내가 늘 기도하며 살게. 엄마도 그곳에서 함께 해줘. 나의 기도가 게을러지지 않길, 흔들리지 않길,

엄마가 늘 함께 해줘. 엄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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