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태조산
bgm. Home by Billy Crudup
같은 사령부에서 소속이라 매일 사무실에서 보고, 훈련 중에는 벙커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2주씩 함께 보내는, 친애하는 통역장교들과 아산 태조산을 다녀왔다! 임관년도 기준 내가 막내이고, 연말에 전역하는 동갑내기 친구(육군 중위)와 바로 앞 사무실 대위님(육군, 베프), 그리고 옆 건물 대위님(공군 선배)과 함께 했답니다.
처음으로 통역장교들끼리 떠난 등산이니 통역장교로서의 복무를 주제로 글을 써나가볼까 한다. 여러 외국군 중에서도 미군과의 교류가 많은 대한민국 국군에서 어학 소요를 지원하기 위해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에서 매년 2회씩 통역장교를 선발한다. 물론 육군의 경우 최근 지원률 감소로 인해 통역사관이 아닌 육사, 학군, 3사 출신 통역장교도 선발하는데, 오늘 함께 등산을 떠난 육군 대위님이 바로 육사 출신 통역장교이다.
남군의 경우 의무복무 충족이 가장 큰 목적이긴 하겠지만 군생활 이후 취업 또는 대학원 진학에 통역장교 이력이 꽤나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메리트라고 볼 수 있겠다. 여군의 경우 (... 나 왜 왔지?) 통역장교로서의 경험을 디딤돌 삼아 그 이후의 진로와 커리어에 연계시키기 위한 목적이 크다. 물론 군생활이 잘 맞는 선배들 중에는 장기복무를 신청하여 대위, 소령 진급까지 하신 경우를 가끔 봤다. 통역장교로 전역한 선배들께서 다양한 기업과 학계에서, 정치, 경제, 사회, 외교, 군사 분야를 막론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전통과 명성을 이어간다는 것 역시 의미가 크다.
그 말인즉슨, 우리는 조만간 군을 떠나 민간인으로서의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템포는 제각각이겠지만 사실 계급과 무관하게 모든 간부들은 언젠가는 민간인이 되기 마련이다. 잠깐 3년 군대살이를 하러 온 통역장교들에게는 그 끝이 더 빠르게 찾아오는데, 그래서 하게 되는 고민이 '과연 내 집(home)은 어디일까'라는 고민이다. 끝이 정해진 여정에서 얼마나 몰입을 해야 할지, 남들보다 빠르게 전역 후의 삶을 준비하는 게 현명한 것일지, 아니면 후회 없이 올인해서 지금의 3년을 군에 백프로 바칠 것인지, 그 사이 어디에서 타협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된다.
통역장교는 한국군과 외국군 간의 소통을 담당하는데, 파급력이 미미한 단순한 하하호호의 대화를 넘어 정책, 전략, 작전, 전술적 단계에서의 실질적인 산물이 있는 업무 협조 관계에서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우리 넷이 전담하고 있는 지휘관은 전부 장성급이셔서 한마디 한마디가 미치는 영향 범위는 위관급, 영관급 실무를 해본 적 없는 우리가 감히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은 통역장교의 장점이면서 단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갓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계급이 비교적 높으신 지휘관들을 보좌하기 때문에 야전이나 예하 부대에서 땀 흘리며 실무를 담당해 보거나, 병력 관리를 해볼 기회는 제한된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우리에게 집이란 어디일까. 평택시 팽성읍에 위치한 7평 남짓 간부 숙소일까, 매주 올라가지는 못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내가 없이도 살아 움직이는 서울의 본가일까. 작은 회의실부터 큰 컨퍼런스룸까지 통역 소요가 매일 발생하는 우리 사령부 건물일까, 아니면 내 미래의 하루하루를 담고 있을 이 한반도, 미국, 또는 그 외의 어느 나라에 있을 대학원 연구실 혹은 한 회사의 사무실일까. 일 년에 2번 한미연합연습을 위해 벙커에 들어갈 짐을 챙기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끊임없이 이동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익숙할지도 모른다. 한국군과 외국군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어조와 말투에 따라 그 회의의 분위기나 실무의 방향성이 좌지우지된다. 통역장교들은 어느 한쪽에 귀속되어야 하는 상황보다 양 극단의 중간에서 입장을 조율해야 할 때가 더 많기 때문에, 자유전자 같기도 한 애매한 위치일 때가 많다.
평생직장이라는 것이 있겠냐만은, 며칠 전 중위도 달았으니 (대위 달 일은 없겠지 설마)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되나 보다. 나름 전역 이후의 삶을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시작했지만 그 이야기는 추후 다뤄보도록 하겠다. 어디에 있든 여행하듯 하루하루를 살아볼까 했는데 어느 정도의 몰입도 필요한 것 같다. 또 그 몰입하는 시간을 통해 알게 되는 새로운 가치들, 그 가치들이 이끌어주고 보여주는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를테면 생전 모르던 군사 작전과 무기체계에 대해 공부하며 세계사 속 성공한 전략적 사고의 전례들을 접할 수 있고, 그 마인드셋을 다른 곳에 응용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지휘관께서 이과가 아닌 인문학적 성향이셔서 더욱 내가 익숙하지 않았던 주제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정말이지 감사한 일이다.
등산 기록을 통해 나의 군생활 생각들을 담아내는 것이 이 연재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오늘의 기록은 그 목적에 부합하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다. 등산을 통해 예상치 못하게 얻게 된 선물이 더 있다면 바로 좋은 사람들과 같이 땀 흘리며 운동할 기회, 그리고 그 이후에 찾아오는 적당히 치팅이면서 건강한 식단을 같이 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아산에 적당한 높이의 산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데, 다른 산 등산 후 저 만두전골(밀푀유나베)을 다시 먹으러 가야겠다. 친애하는 통역장교들과 함께 했어서 더욱 기억에 남을 태조산 등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