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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위라고 불러주세요!

13% - 설화산

by 샤샤
bgm. The Only Excpetion by Paramore

물론 등산 중에는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을 들으면서 꾸역꾸역 올라간 건 안 비밀. 매 글의 브금은 사실 약 1시간의 글 쓰는 시간 동안 듣는 음악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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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입구!

새벽 03시 기상하여 일출을 보러 가려고 했던 것이 설화산 등산의 계기였지만, 알람을 잘못 설정해 버려서 05시에 일어나 버렸다. 날씨도 우중충하고, 전 날 살짝 비도 와서 등산길도 미끄러울 것 같아서 정말이지 몸이 무거운 아침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고민하다가, 진급 기념 등산을 미루면 안 될 것 같아서 차를 끌고 떠났다. 옷도 애매해서 그냥 눈에 보이는 거 주섬주섬 입고 나왔다. 가방도 없이, 물도 없이 그냥 맨손으로 떠난 첫 등산이었다.


20분 정도 운전하고 가니 등산로와 연결되는 초원아파트의 주차장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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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설화산은 벌레가 진짜 많았다. 날씨가 습해서 더더욱 그랬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등산로까지의 길을 처음에 찾지 못하고 15분은 헤맨 것 같다. 이걸 계속해 말아 고민하다가 새벽부터 텃밭을 가꾸고 계시는 한 주민분께 여쭤보았고, 다행히 등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전의 나는 이렇게 난관에 봉착하면 바로 포기하는 빈도가 더 높았는데, 이젠 하기 싫은 것도 참고 잘 착수할 수 있어요. 왜냐면 중위니까요. 이젠 등산하다 길을 잃어도 잘 돌아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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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이 코앞이다'라고 생각한 구간이 꽤 길게 이어졌다. 경사도 가파르고, 여기만 오르면 정상이겠지 생각한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멈춰서 숨을 고르고 또 오르고를 반복했다. 혼자 등산하는 게 오랜만이라 살짝 무섭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했는데, 내 페이스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이었다. 또 묵묵히 조용히 산을 올라가며 내 오히려 내 안을 잘 들여볼 수 있었고, 글에 담을 생각의 파편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채웠다.


최근 공군통역장교회에서 주요 직위자 전담 통역장교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SNS 카드뉴스로 홍보하여 공군 통역장교 지원률을 높이려는 긍정적인 시도 중 하나이다. 미리 보내주신 질문지를 보며 내 1년간의 장교 생활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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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온 정상!

인터뷰 질문 중 "한 단어로 통역장교의 삶을 표현한다면?"이라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연금술"이라고 답변했다.


아무런 경험도 없는 갓 소위 통역장교를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군 의전서열 한자리 수인 4성 장군의 통역장교로 보임하는 첫 번째 사례가 나였기 때문에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자리였고 선발을 위해 그만큼 주말을 전부 반납해 가며 공부했지만, 오히려 선발 이후가 더 힘들었다. 중요한 통역 전 날은 잠을 설쳤다. 통역 이후에는 실수한 부분들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서 또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아무래도 나는 전문 통역가도 아니고, 통역교육은 임관 후 3개월간 특기교육받은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전반적인 노하우가 부족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인공지능 수준의 "완벽한 통역"에 집착했고, 내가 조금이라도 그 범주에서 벗어난다면 부족한 나를 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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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정상!

내가 지금까지의 생활을 "연금술"에 빗댄 이유는, 이제는 완벽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들은 납을 금으로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연금술을 통해 수많은 원소, 각종 실험방법, 장비를 발견했고 이후 화학의 발전에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통역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내뱉는 말의 퀄리티는 회의 내용에 익숙한 정도, 그날 컨디션, 심지어는 급하게 화장실이 가고 싶은지에 따라 항상 완벽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완벽을 목표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군사적 지식, 외교적 배려의 태도, 효율적인 메시지 전달 방식은 앞으로 내가 어떤 커리어를 추구하든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 모시고 있는 장군님과는 1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합을 맞추었기 때문에, 이젠 첫 단어만 말씀하셔도 어떤 얘기를 하실지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장군님이 오시면 첫 적응의 과정을 반복하게 되겠지만, 이젠 어떻게 해야 나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지휘관을 보좌할 수 있을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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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가 비상을 시작하는 형상을 한, 칠승팔장지지의 명당 설화산.

또 세상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듯, 내가 등산로 입구를 헤매고 있을 때 도와주신 아파트 주민분, 등산로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는 등산객분들,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하셨다며 설화산 정상에서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신 등산 고수 아저씨가 있었기에 꾸역꾸역 혼자 할 수 있었던 등산이었다. 지금까지의 군생활, 앞으로 전역까지의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감정이 태도가 되는 사람은 short-sighted 하다는 증거가 되는게, 아주 조금만 시야를 넓혀도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안개가 살짝 있었음에도 설화산 정상은 최고였다. 비록 높이는 차이가 많이 나지만 북한산에서 느꼈던 감정을, 더 좁은 정상의 공간에서 오롯이 회상했다. 일출을 보러 다시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깜깜할 때는 오르는 길이 마냥 편하진 않아서 위험할 것 같기도 하다.


KakaoTalk_Photo_2025-06-08-20-57-35 014.jpeg 혼자 일요일 새벽에 적당한 숲 속 공간을 찾아 피리를 부는 인생이란. 본받아야지

등산은 45분, 하산 도중에는 길을 잃어서 45분이 걸려버린 아침 산책 수준의 의미 있는 설화산이었다. 망설였지만 절대 후회는 없는 새벽 등산이었고, 무려 그 몸을 이끌고 서울에 있는 교회 예배까지 오랜만에 다녀왔다. 체력이 좋아지고 있나 보다. 무리하지 말고 앞으로 남은 2년도 한 발씩만 내디뎌보자.


대위 진급은... 없을 거니까요. Or 아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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