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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Apr 18. 2023

커피 내리는 시간

이마저도 나에겐 행복



늑장 부리다 모임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커피머신 전원을 켠다. 카페인 중독은 아니지만 살짝 낮은 혈압 때문에 아침 커피를 사수하지 못한 날은 온종일 찌뿌둥하다. 그런데 웬일. 몇 개 남았다고 생각했던 캡슐이 똑 떨어졌다. 바쁜 중에도 드립백을 꺼내 담고 어떤 글을 쓰냐는 물음이 나에게 올 때까지 이리저리 커피 물을 부어 어쨌든 마지막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냈다.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아침을 시작한다.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책을 읽거나 내가 가꾸는 식물에 물을 주거나 방금처럼 커피를 내리고 가만 기다릴 때가 그렇다. 특히 커피를 내리고 기다릴 때는 그 잠깐 동안 온 집안에 퍼지는 원두 향 덕분에 오감이 즐겁다. 순간이지만 나의 행복지수를 한껏 올려주는 셈이다. 캡슐 머신이 나의 수고를 덜어준 지 오래지만 좋아하는 원두를 고르고 핸드드립으로 추출한 커피가 너무 좋았던 때는 커피를 배워볼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혼자 킁킁대며 만들어내는 짧은 시간의 행복을 배움으로 채우진 않았지만 커피는 나에게 맥주만큼이나 각별하다.


지금처럼 카페가 성행하지 않았던, 그러니까 내가 갓 직장인이 되었을 무렵 진주에도 제대로 된 카페가 생겼다. 사장님이 로스팅도 직접 하시고 손수 핸드드립커피를 내어주시는 그런 카페 말이다. 보기엔 다 똑같은 커피 같았으나 내려지길 기다리며 코끝에 전해오는 원두 향, 그가 담긴 잔의 아름다움과 커피 농도에 따라 달라지는 뽀얀 자기와의 어울림, 한 모금 마셨을 때의 전율까지도 저마다 달랐다. 견과류, 초콜릿향, 과일 향 따위의 짤막한 설명만 곁들였을 뿐인, 당시엔 생소했던 원산지 이름이 붙은 커피를 선택하곤 턱을 내밀고 커피 맛을 상상하며 그 한 잔을 기다렸던 때가 있었다. 좋았다, 그 순진무구했던 20대가.


염증수치 폭발로 입원했던 그때에도 나는 커피가 그리워 죽을 지경이었다. 내내 물만 마시다가 열도 떨어지고 내 발로 걷기도 수월했던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도 커피였다. 그날 주치의 교수님 회진 시간만 목을 빼고 기다리다 커피 딱 한 잔만 마셔도 되겠느냐 물었었다. 한 잔 정도는 뭐 괜찮죠,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가 커피 한 잔에 황홀경을 부르던. 커피는 그만큼 내게 좋은 친구다.

최근에는 커피를 마주한 내 모습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얼죽아’를 외치며 내려진 커피를 벌컥 마시기만 했던 나는 ‘뜨아’를 찾는 사람이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찬 음료를 쥐었을 때 몸의 이상반응 때문이다. 하지만 뜨거운 잔 앞에 앉으니 의외의 즐거움이 있었다. 커피가 내려지길 기다리며 맡았던 그 찰나의 향을 온몸으로 마시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계절상 아직 이른 아지랑이춤을 커피잔 위에서 만나니 기쁜 맘이 차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도 커피 한 잔을 내려 가만히 오늘 할 일을 짚어본다. 잠깐 숨을 고르고 앉아 여유를 즐기는 때에도, 나른한 오후를 순조롭게 이끌어 가기 위해서도 커피는 필요하다. 기호 식품이라 하기에는 너무 가까워져 버린 우리 사이가 어떤 이유로든 멀어지지 않길 바라며, 커피 한 잔의 행복만은 어떤 경우에도 사수하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으로 두서없이 시작한 글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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