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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May 02. 2023

마지막

마지막 잎새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든 실패 없는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마지막에 웃는 이가 되기 위해 애를 쓰며 산다. 희망 없는 마지막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2023년 봄,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찬란한 봄의 마지막은 병원 문을 여닫는 것으로 장식했다. 언제부턴가 봄은 무언가 움트는 기분 좋은 계절이라기보다 나의 건강을 먼저 염려해야 하는 특별한 계절이 되었다. 

병원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 움츠린 봄은 지나고 어느새 화창하게 핀 봄이 나를 맞이했다. 아파트 화단에 핀 하얀 철쭉이 경쟁하듯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는데 이제 화려한 철쭉은 간데없고 다 시든 꽃잎들만 덩그러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꽃은 저물고 다시 여기저기 초록이다. 햇살을 머금고 더욱 빛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꽃과 함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봄을 다시 쓴다.



내가 늘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에 번뜩 나를 이끌어주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 나를 위해 생각지도 못한 기도를 바쳐주었을 때, 살아있는 것들의 힘이 내 눈에 보일 때가 특히 그렇다.

오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연둣빛 여린 잎을 단 나무가 한눈에 보였다. 우리 동에서 유독 우리 집 창가에만 우뚝 선 나무인데, 처음 이 나무를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한 겨울이었다. 사철나무들 사이에 서서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떨궈야 할 잎을 온몸에 붙이고 선, 조금 궁상맞아 보이는 나무 두 그루가 바로 이들이었다. 지금이야 갖은 초록빛으로 내 눈을 즐겁게 하고 꽃에서 눈을 돌려 나를 다시 생명으로 이끄는 나무지만 말이다. 사실 이 나무들 사이로 새는 빛은 내가 눈 뜨며 가장 먼저 만나는 창밖 풍경이기도 해서 특히 줄기가 좀 가는 한 그루가 뿜는 생명력을 나는 공기처럼 나누어 가지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가만 바람에 너울대는 잎사귀들이 예뻐서 버선발로 달려 나가 가까이 그 아래 발치에 서서 하늘과 함께 내 눈에 담아 보았다. 매번 정확한 이름을 찾다 포기하곤 하지만 외래종 참나무 가운데 하나인 건 분명하다. 이사 온 첫 해 여름에는 초록이 주는 기운이 너무 예쁘고 좋아서 반짝이는 잎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지난해 가지치기를 많이 한 이후로는 보기가 영 안쓰러웠다. 그러다 오늘 무심코 본 나무에 새 잎과 어린 가지가 많이도 돋았다. 눈에 띄게 변하는 풍경은 아니지만 가만히 나를 두드려주고 자라게 하는 풍경이라 사실 많은 힘이 된다. 처음 만난 그 겨울에 ‘아니 저 나무는 흉측해 보이게 저 잎을 왜 끝까지 달고 있어? 새 잎 돋으면 그거나 예쁘게 받지’하며 비쩍 마른 데다 마른 잎까지 주렁주렁 단 나무를 흘겨보았었다. 밖에선 본 것처럼 우리 집 거실에서 바라본 그 나무가 썩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잎이라도 떨궜으면 나무 자체로 멋졌을 텐데, 했던 그 나무를 ‘마지막’이라는 단어 앞에서 다시 생각한다. 봄이 되어 새 순이 돋고,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고, 낙엽이 지고 다시 새 순이 돋는 일련의 나무의 일생 중 우리가 흔히 마지막이라 부르는 때가 낙엽을 떨구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채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면 이 나무에게 마지막이 없는 거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뭇잎을 붙들고 살다가 비로소 새 잎이 나기 시작하면 어느샌가 비쩍 마른 그 잎들을 떨구어 버리고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봄만 되면 병원 출입이 잦아 건강염려증에 걸릴 지경인 나는 늘 꿈을 꾼다. ‘아, 이렇게 오는 병원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하고. 그래서 나는, 내 마지막은 생명력 강한 저 나무를 닮고 싶다는 거다. 새 잎에 자리를 내어주기 전까지는 어떤 흉측한 몰골로도 제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저 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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