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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Mar 07. 2024

아빠의 맛

책을 읽다 문득


어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라는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문장을 만났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엄마의 출산 예정에 맞춰 먼 친척에게 맡겨진 주인공 소녀가 아빠를 집으로 보내고 난 후 느끼는 감정이다. 어떻게 아빠가 떠난 후 내 감정과 분위기를 저런 맛으로 표현할 수 있나 신기하기도 했고, 문득 나는 아빠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종종 지난 시절의 사진을 들추어 볼 때가 있다. 그때엔 내 모습보다, 미처 몰랐던 부모님의 모습에 더 눈길이 가곤 한다. 여전히 건강하시고 꼿꼿한 두 분이시지만, 사진 속의 부모님은 지금보다 더 까만 머리, 세월을 타지 않은 매끈한 얼굴, 마른 몸이다. 사진 속의 젊은 엄마는 긴 파마머리로 반묶음을 하고 어느 꽃무리들 사이에 선 모습이 많다. 아빠는 어떤 데는 장발, 어떤 데는 지금보다 조금 긴 커트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서 계신다. 그 뒤의 사진을 따라가 보면 아빠는 나나 동생들을 안고 있거나, 밥을 푸는 등 일상 속 다정하고 가정적인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녀의 아빠는 가장이지만 무책임하고, 가정적이기보다 자기의 즐거움이 우선이고, 자존심만 센 사람이었다. 그래서 돈이 없어 건초를 마련하지 못했어도 아이도 아는 뻔한 거짓말을 하고, 아이를 맡기고 가면서도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난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이런 아빠의 행동이 먼 친척집에 와서야 비로소 느끼는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와 대조되어 소녀의 눈으로 ‘아빠가 떠난 맛’이라고 표현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소녀에게 아빠가 떠난 다음이 오히려 평화의 맛이었다면, 우리 아빠는 함께 있을 때 더 달콤한 맛이었다. 어린 시절엔 몰라서, 학창 시절에는 바쁘고 귀찮아서,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나밖에 몰라서, 결혼 후에는 내 가정에 충실히 해야 해서... 아빠에게 우리는 늘 1순위였지만, 나에게 아빠는 여러 가지 이유로 늘 후순위였다. 그래도 언제나 가정이 우선인 아빠는, 외할머니께도 가정적이라는 이유로 후한 점수를 받았다고 했다. 어딜 가나 가족과 함께, 술을 즐기지도 않으셨기에 집과 회사만 오갔던 아빠는 어떤 때는 자유를 부르는 우리의 목을 죌 때도 있었지만... 잘 안다. 모든 게 평화로운 가정을 위한 움직임이었다는 걸. 여느 평범한 집처럼 다섯 식구가 무탈하게 이만큼 커서 잘 사는 것도 모두 아빠의 희생 때문이었음을 안다. 작은 체구에 삼 남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지냈지만, 아빠가 보여준 마음의 맛은 세상 어느 맛과도 견줄 수 없는 따뜻한 맛이었다. 며칠 전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낮에 딸아이가 영상 통화를 걸어와서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고. 늘 먼저 전화를 걸어야만 마지못해 받아주던 손녀딸이 먼저 전화를 걸어 조잘대니 기분이 아주 좋으셨나 보다. 우리 남매에게 향하던 아빠의 사랑은 어느새 한 대를 질러 내리사랑이 무언가 보여주는 새콤한 맛이 되었다. 못됐게도 제 한 마디면 다 되는 딸아이가 할아버지를 들었다 놨다 하는데도 그게 애지 뭐 하고 허허 웃는 게, 가끔 톡 튀는 맛이 있는 그런 아빠.


엄마를 이야기할 때보다 구구절절 많은 말로 수식할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있어줘서 늘 고마운 아빠는 듬직한 맛이고, 따뜻한 맛이고, 늘 내 편인 맛이다. 다 아는 한 끼 밥의 맛처럼 아는데도 또 먹고 싶게 끌리는 맛이고, 따끈한 김이 얼굴에 서릴 때처럼 평화로운 맛이다. 아빠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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