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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Dec 02. 2021

이렇게 또 자랍니다.

묵은 마음 쏟아내기



아이는 한 번씩 크게 아프고 난 후면 늘 훌쩍 자랐다. 밥도 잘 먹지 않고 투정을 부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나아서 환히 웃었다. 마치 더 자라기 위한 통과 의례를 치르는 것처럼.

11월엔 내가 그랬다. 갓 내린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하는 별다를 것 없는 아침이 사치같이 느껴졌던, 11월이 갔다. 호기롭게 시작한 그 무엇들이 11이란 숫자처럼 내 앞에 주르륵 내렸다 그쳤다.


좋아서 시작한 일들이 하나씩 발목을 잡았다. 그저 매일 쓰기의 습관을 갖고 싶어 가볍게 시작한 에세이 캠프가 가장 큰 매임이었다. 아이의 등교 준비를 돕는 아침 8시가 되면 띵, 잊지도 않고 울리는 오늘의 주제 메시지는 글 한 편을 완성해 올리기까지 내내 머릿속에서 띵띵거렸다. 주제를 주면 글을 잘 쓸 거라고 생각한 것도 오산이었다. 영끌을 해도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 먹먹한 주제들. 인풋 없이 아웃풋도 없다는 말은 아이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프라인으로 하는 그림책 모임은 그림책을 읽는 동안, 나도 한없이 동글동글 해지는 것 같아 참 좋다. 그런데 11월엔 내가 내야 할 발제문만 둘 이상. 듣는 것과 이끌어 가는 것의 차이는 컸다. 다행히 21년의 발제는 이제 끝났다. 교리 수업이 없어 아무 하는 일 없는 것 같아 미안했던 주일학교 일도 한몫 거들었다. 다시 시작한 성경 공부는 또 어땠나. 퇴근 후 급히 저녁을 차려먹고 차로 5분 거리의 강의실에 겨우 쫓아가 앉기까지,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딱 오늘 밤이 마지막 날이네. 어쩐지 하나의 일만 해도 과부하인 내 생활을 몇 등분해야 하는 일상이 계속이었다.


“요즘 뭐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거나, 업무량이 늘었습니까?”하고 묻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아니오, 그런 거 없는데요.”라고 했던 내가 우스워진다. 이렇게 적어두고 보니 평소보다 많이 움직였다. 가볍게 시작한 감기는 낫질 않고, 호르몬 이상으로 몇 개의 병원을 들락거렸다.

아프면서 큰다는 어른들의 말씀처럼 나는 11월 내내 아팠다. 그리고 바빴다. 몸이 힘든 것이 아니라 시간에 쫓기는 마음이 힘들었다. 좀처럼 늘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흘러가는 대로 쫓아가기만 하던 시간 조각들을 내가 이끌고 가려니 조금 벅찼나 보다. 모두 나의 선택지대로 움직인 한 달이었는데... 앞으론 속도를 조금 늦춰야겠지. 그래도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활기는 되찾았다. 무언가 하고 있다는 느낌이 주는 안도감이 좋다.


아, 어쩐지 생각나는 대로 막 쏟아붓고 나니 이곳이 대나무 숲이라도 된 것 같다. 이제  2022년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통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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