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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Aug 12. 2021

맥주 한 잔 하실래요?

나에게 말을 건네다


맥주 한 잔 하실래요?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날에도 듣기 반가운 소리다. 여름에 가장 환영받는 어른의 음료지만 사실 계절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속이 보이는 투명한 잔에 가득 맥주를 따르고, 가장 위의 거품 한 겹부터 홀짝이며 마시는 시간이 나에게는 작은 스트레스 해소구이다.

맥주가 없었다면, 나는 꽤 자주 활화산의 분화구와 같았을 테지만………. 어쨌든 올여름도 적당히 끓고 식기를 반복하며 하루살이를 즐기고 있다.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상황에 적확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비교적’ 글로 전하는 생각이 내 마음을 더 잘 담고 있다. 나는 싫은 소리는 잘 못한다. 그래도 싫다는 글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나는 버럭 화를 낼 수는 있지만 논리 정연하게 반박하는 말은 못 한다. 글로 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나 대신 혼자 털어내기를 하며 열을 식히고 싶은 이때 딱 좋은 친구가 바로 맥주다. 물론 상대와의 대화 중에 무언의 부정을 하고 싶을 때 혼자 홀짝이기도 한다.


최근에 아버님과 술 한 잔 할 기회가 생겼다. 어른들의 말씀이 대체로 그러하듯 메아리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오기만 하는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맞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 나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맥주를 마셨는데, 배가 부르지도 취하지도 않았다. 그저 꾸역꾸역 마셨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당연히 그날 맥주는 무(無) 맛이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향이 좋은 맥주를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책맥이 또 그렇게 술술 넘어가니까.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을 때는 그냥 맥주 향만 맡아도 좋다.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아 그리 취하지도 않지만 맥주의 목 넘김에 살짝 나른해지는 느낌이 좋다. 좋은 사람들과 만났을 때 자연스런 대화를 안주 삼아 마실 때에도 이만한 것이 없으니, 맥주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이 어른이 되어 좋은 것 중 하나랄까.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것이 있는 날에도,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 미련이 없는 날에도 맥주는 늘, 옳다. 막 캔을 땄을 때의 향과 울림도 좋고 투명한 잔 속에 몽글몽글 거품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는 것도 좋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나도 맥주잔 속에 떠다니는 동그란 거품이 된 것 마냥 자유로워진다.


입추가 지나고 바람결이 선선해졌다. 타는 목마름은 없겠지만, 그리 속 끓일 일도 여름보다 덜 하겠지만 그래도 무슨 핑계를 대든 맥주 한 잔은 사수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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