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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Apr 11. 2018

세상의 조롱에 입을 맞추는 기쁨

오경택 연출, 창작 뮤지컬 <레드북>


멀리 갈 것까지 없다. 서른 중반을 넘어선 싱글 여성인 나는 늘 완벽하지 않은, 안정적인 제도로 향해 나아가야 하는 아직은 불완전한 존재로 평가받는다. 얼른 결혼해야지라는, 지금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끊임없는 시선과 발언이 늘 나를 괴롭힌다. 게다가 기독교인이라면, 상황은 보다 불편해진다. 뮤지컬 <레드북>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와 같이, 결혼은 해야 하지만 그 전까지는 어떠한 성적 관계도, 여성의 신체에 대한 어떠한 표현도 금기시된다. 평소 옷차림과 태도까지도 보다 정숙할 것을 강요받는다. 마치 여성의 몸과 욕망은 결혼을 하고나서야 존재하는 것처럼, 또는 그 이후로도 숨겨야 하는 어떤 것인 것처럼, 그렇게 가르치고 배운다.


그런 교육과 학습이 정말 경건한 삶과 연결된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하지만 정작 교회 안에서 성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면, 이에 대한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교회안의 사람들은 그저 우왕좌왕,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리며, 사실을 숨기기에만 급급하다. 결국엔 이도저도 아니고 상처만 배가 되는 일이 뉴스거리가 되는 일은 너무도 흔하다. 뮤지컬 <레드북>은 여성의 자기표현이 제한받던 시대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남고자한 한 여성의 ‘사랑’ 이야기를 담는다.



주인공 안나는 솔직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이다. 그녀는 어릴 적 소꼽친구와 사랑을 했지만 상대는 일찍 죽고 만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에게도 약혼자가 생긴다. 결혼 전 안나는 그에게 사랑했던 사람과의 첫 경험을 고백한다. 그러자 약혼자는 파혼을 요구하고 남부끄러운 일을 저지른 안나는 집에서도 쫓겨난다. 쫓겨난 안나는 부유한 노부인의 집에 취직한다. 삶을 지속할 낙이 없어 그저 기운 없이 늙어가는 노부인의 이름은 바이올렛이다. 그런 그녀에게 안나는 야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삶의 생기를 더해준다. 바이올렛은 늦었지만 안나 덕분에 희망을 얻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정인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녀가 죽고 안나는 새 일자리를 구한다. 바이올렛은 안나에게 고마움을 담아 유산을 남기는데, 그녀의 손자인 변호사 브라운이 이를 대행한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 자신이 이야기를 쓰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안나는 글을 쓰기로 하고, 여성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을 찾는다.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은 어딘가 남들과 달라 보인다, 그중 로렐라이는 사랑의 아픔을 가진 여장 남자다, <로렐라이 언덕>의 모든 여인들은 그들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안나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글로 담아 <레드북>을 출간하다. 당시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솔직한 사랑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다. <레드북>의 솔직한  사랑표현에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남사스러워하면서도 몰래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브라운은 그녀의 솔직한 매력과 그녀의 작품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자꾸 세상이 원하는 것을 거부하는 그녀가 불편하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평론가 존슨은 그녀에게 자신의 뮤즈가 되면 그녀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주겠다며 성적인 대가를 요구한다. 아, 이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라니. 그것을 거절하자 그는 그녀를 신성모독과 음란물 유포로 법정에 고발한다. 그녀의 변호를 맡은 브라운은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 안나에게 정신병인척 하고 선처를 구하자고 제안한다.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은 안나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브라운은 그녀의 뜻을 존중해, 그녀의 책을 통해 삶의 변화를 체험한 주변 사람들의 편지와 탄원을 모아 그녀의 무죄를 증명하고, 안나는 작가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물론 그들의 사랑까지 현재진행형.



행복한 엔딩과 신나는 음악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현실에 이런 판타지는 없겠지 싶어 한편으로는 조금 우울했다. 설령 안나가 유죄를 선고받고,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해도, 세상이 뭐라 하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고자 한 안나의 선택은 이미 충분한 해피엔드이다.


창작뮤지컬인 <레드북>은 연출과 배우들의 노련함은 물론 노랫말에 가득 담긴 작가의 생각, 힘 있는 음악과 노래, 상징적인 안무와 의상, 한권의 책을 펴보는 것 같은 무대까지, 완성도가 너무나 높은 작품이다. 게다가 내가 나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작가의 말을 빌린다면, 그것이 남들과 다르고 어색한 것이어도, 나쁘고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를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우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 결코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어야 한다는 것. 그때까지 다만 타인의 조롱과 비난에 꿋꿋하게 입을 맞추기를. 그런 모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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