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주제라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제 점점 나이 든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시점에 당도했음을 느낀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나 스스로를 위한 고민이기도 하고, 내 가족을 위한 고민이기도 하다. 나의 늙어감과 늙은 모습을 그려둘 필요가 있다. 늙은 나의 어떤 추구미.
내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두 개의 차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나는 '우아함과 깊이'에 관한 것, 다른 하나는 '육체의 노쇠함과 낡아짐'에 관한 것이다.
우아함. 그러니까 항상 '나'의 감정과 '나'의 상황이 앞서는 것은 우아하지 않다. 동시에 항상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기준이 앞서는 것도 우아하지 않다. 전자는 항상 내가 받아야 할 대우에 대해서 상정하며, 그렇지 못할 때 분개하거나 스스로 무너진다. 후자는 늘 전전긍긍 불안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열망하며 늘 부족함에 처한다. 우아함은 이와 꼭 반대인 것. 타인의 상황이 괜찮은지, 먼저 배려하는 것, 동시에 자기의 주관과 기준이 확실해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옳은 선택을,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아해질 수 있다. 이렇게 쓰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이 우리를 조금 더 우아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를. 깊이는 어떤가. 깊이는 인풋이 중요한 것 같다. 좋은 것들, 영감을 끊임없이 공급할 것 그리고 나의 사고로 확장하고 내 안에 저장할 것, 여러 측면에서의 살펴봄이 조금 더 깊은, 그리고 유연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 유연함 역시 우아함과 관계있다. 나이 들수록 고정되고 하나의 답만을 정답으로 여기게 되기 쉽다. 뭐든지 흐르고 순환이 될 여지와 통로는 있어야 하는 일.
며칠 전 점심에 교보문고로 산책을 가서 동화책을 한 권 샀다. 2026년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 지현경 작가의 <수탉과 아기 새>. 서점에서 단숨에 읽고, 두고두고 읽고 싶어서 들고 왔다. 이 책은 부모에게는 육아지침서이고, 아이에게도 스스로를 찾는 과정을 들여다보게 하는 지점이 있다. 민화로 그려진 그림도 너무나 멋졌다. 수탉이 우연히 알을 줍게 되어, 품고 키우는데, 그렇게 태어난 어린 새가 날 수 있도록 좋은 선생님을 백방으로 찾아다닌다. 결국 과정 중에 경험한 감각들을 깨우며 스스로 나는 법을 깨우친 아기 새가 (어느새 독수리로 성장해) 위기에 처한 수탉을 구하기 위해 첫 비행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렇게 수탉은 첫 비행을 기뻐하며 세상으로 떠나는 어엿한 독수리를 배웅한다. 이 책은 아이를 위한 책이기보다 육아하는 어른을 위한 책 같았다. 끊임없이 가르치려 하는, 지도한다는 이유로, 지적만 하는 육아가 아니라 스스로 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는 육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오리와 꿩의 방식으로, 훨씬 뛰어난 사냥꾼이 될 아기 독수리를 판단하는 모양새도 경계할만하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어른의 일은, 모든 것을 다 통제하려는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같기도. 작년인가 조수용 작가의 <일의 감각>을 읽었는데, 작가를 대하는 작가엄마의 태도가 꼭 그러했다. 어른임에도 자기의 자녀가 자신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작가를 보다 제대로 살게 하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아이를 진짜 믿어주는 감각이 내게도 필요하다. 우아한 엄마로 늙어가는 길.
실은 꽤 오래전부터 사서 자격을 따고 싶었는데, 이유인즉, 사서 할머니가 되는 것이 우아하고 멋져 보여서 이다. 아이들에게 멋진 동화를 큐레이션 해주는 할머니를 상상해 보라. AI시대에 무슨 사서냐며 포기할까 싶었는데, 어쩌면 이 일이야 말로 가장 인간적인 활동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언젠가 꼭 도전할 것.
우아함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나이 든 다는 것은 여러모로 서글픈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우아하기가 어려워서이고, 아무리 추구하려 해도, 삶의 고단함이 발목을 잡고, 육체의 노쇠함이, 고갈된 체력이 더 나은 세계로의 이행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년에 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44년생이시니 여든두 해를 사셨다. 자랑할 것이 많지 않은 우리 집에 큰 아버지는 든든한 가장이셨고, 존경받는 분이셨다. 전기기술사셨고 대학 강단에도 서셨다. 평생 큰아버지의 말씀하시는 모습과 행동이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아우이지만 목사 된 동생을 섬기는 장로님이셨고 명절이면 뭐든 더 싸주지 못해서 마음을 쓰시던 모습, 고생하는 제수씨들에게 늘 따뜻한 말을 건네는 어른이었다. 내가 아는 가장 어른 다운 분. 그런 큰아버지도 돌아가시기 1년 남짓한 기간에는 많이 노쇠해지셨다. 병문안을 가서 뵌 큰아버지는 파킨슨과 여러 병마로 힘들어하셨고, 조금만 걸어도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쉬어 가셔야 했다. 큰아버지는 늙어감과 병들어간다는 사실보다 그런 늙은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로 인해 더 힘들다고 하셨다. (환자의 입장에서)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 같이 느끼고, 잘 들리지 않고, 병원이라는 구조와 방식이 익숙지 않아 실수가 생기고, 못 알아듣는다 핀잔할 때, 우울과 절망감이 몰려왔을 것이다. 자녀가 해외에 있어 의지하기가 어렵고, 아우들도 함께 늙어가니, 그저 그런 나이 듦에 대한 멸시를 견뎌야 하는 것이 가장 슬프셨던 것 같다. 나이 들었다는 것은, 모든 기능이 저하되었다는 것은, 젊은 시절 어떤 사람이었든지, 얼마나 많이 배웠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말귀가 어두운 노인네로 치부되는 일이다. 큰아빠가 나이 듦의 슬픔과 어려움을 너무도 젊잖고 덤덤하게 말씀하시는데, 마음속 깊은 곳이 쓸쓸하고 슬퍼져서, 늙는 일이 조금은 두렵게 다가왔다.
질병은 몸도 힘들게 하지만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준다. 스스로를 돌볼 물질적 여력이 없는 것은 아마도 몇 곱절의 절망일 것이다. 엄마도 이모도 늘 절약이니 연금이니 잔소리하며 노후 준비를 하라고 야단이다. 아이에게 올인하지 말고 너희 노후를 챙기는 것이 아이를 위하는 거라는 조언. 늙어감도 다시 돈의 가치와 연결되니, 돈돈돈 하는 일이 조금은 지긋지긋하다. 그렇지만 뭐라도 준비는 필요한데, 학습이 잘 되지 않는다. 현금의 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실거주하는 집은 자산이기보다 그냥 집이니 자산이 불어날 기회가 없다. 급여생활자의 노후대비는 그저 불안과 공포. 예정된 쓰나미. ‘이렇게만 하세요 ‘라 외치는 이런저런 유튜브로 위안하는 것에 멈춰있는 일일 뿐이다.
운동을 하고, 영양제를 먹는다고 질병과 늙음에 대한 대비가 되는 것일까. 건강하면 좋으련만. 모두의 여건이 같지 않고, 대책이라는 것도 요원하다. 병마는 이유 없이도 홀연히 오기도 하고, 육체의 노후는 필연적이다. 아이가 어린 나는, 늘 기도한다. 아이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될 때까지는 건강하게 곁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든든하고 우아한 엄마이자 할머니가 되어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신에게, 나의 하나님께 구하고는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면, 아이와 함께하는 하루하루, 나의 부모님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더 소중해진다. 우아함을 추구하는 마음과 나이 듦을 여유를 가지고 받아들일 정신(단련)과 스스로를 돌볼 경제적 여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가장 우아한 나이 듦의 비결은 오늘을 행복하게, 지금의 모든 것들을 충분히 누리는 것에 있다. 단단한 신앙에 발을 딛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