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산미 예찬
우리의 이야기는 3개의 큰 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요리 세계의 주연급인 굵직한 식재료가 첫 번째, 두 번째는 그 재료가 사람의 손을 만나 변화하는 원리 즉, 테크닉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이 모든 서사가 수렴하는 종착지, 바로 ‘맛’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지금껏 10편에 걸친 글에서 ‘단맛’과 ‘짠맛’이 주로 도마 위에 올랐고 지난 토마토 편에서 ‘감칠맛’도 잠시 등장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언급할 중요한 맛이 남았다. 바로 ‘신맛’이다. ‘매운맛’은 맛이 아닌 통각, 그리고 ‘쓴맛’은 요리에서 그 자체로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 잠시 미룬다. 쓴맛은 초콜릿과 커피의 세계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간단한 ‘맛’ 시리즈의 마무리를 미리 자축하며 오늘은 ‘산미’에 대한 썰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우리에게 ‘산미’는 아직 그다지 친근한 단어는 아닌 듯하다. 원두를 선택할 수 있는 섬세한 카페에서는 종종 ‘고소한 것’과 ‘산미가 있는 것’ 중 고르라고 하는데, 대개는 구수한 커피를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 와인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이러한 ‘산미 기피 경향’이 좀 더 명확히 드러난다. 교육열의 민족답게 WSET 레벨 3 정도는 취미로 따곤 하는 요즘, 와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높아지며 산미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산미가 돋보이는 와인보다는 미디엄 이하의 산미에 약간의 당도, 짙고 어두운 풍미가 돋보이는 풀바디 레드 와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유지되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산미를 약간 데면데면하게 여기는 듯한 경향의 원인을 정확하게 꼬집기는 힘들다. 그러나 먼저 우리의 식탁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순수한 맛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폭발적인 맵단짠과 감칠맛, 그리고 참기름의 고소함까지 서로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형국이다. 영화에 대스타들이 너무 많이 캐스팅된 탓에 산미가 ‘조연’으로도 얼굴을 들이밀 틈이 없다. 게다가 우리 한식만이 가진 독특함으로 매운맛이라는 ‘통각’이 파티의 주최자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필연적으로 신맛과 강하게 부딪히는 성격이다. ‘매콤 달콤’이나 ‘새콤달콤’은 있어도 ‘매콤 새콤’은 못 들어본 이유다. 다시 말해 우리 식탁은 산미가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지극히 제한된 맥락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장과 함께 우리 식문화를 대표하는 얼굴이 바로 ‘잘 숙성된 새콤한 김치’라는 점은 미식의 관점에서 곱씹어 볼 만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김치가 한식의 상징으로 자리하는 것은 우리 식탁에 부족한 하나의 퍼즐, 바로 대스타들의 틈바구니에서 ‘산미’를 메꿔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의 ‘산미 기피 경향’을 감안하더라도, 본능적인 맛의 차원에서는 부정하기 힘든 산미의 중요성을 암시하는 강력한 반증으로 나는 해석한다.
실제로 ‘산미’는 먹고 마시는 세계에서 우리 생각보다 훨씬 폭넓고 중요한 행보를 보인다. 요리 세계관은 크게 ‘짠 음식’과 ‘달콤한 음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음식은 ‘소금의 맛’과 ‘설탕의 맛’으로 양분된다. 이 구분의 정도는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는데 우리 식문화의 경우 반찬을 펼쳐먹는 형태로 이 두 세계가 약간 혼재되어 있는 경향을 띤다. 마치 로맨틱 코미디와 호러가 섞인 특수한 장르처럼 전혀 상반되는 맛들의 반전과 화해가 다이내믹하게 벌어진다. 반면, 서양 식문화는 코스의 형태(전채-메인-디저트)로 맛을 두부 자르듯 나눠서 즐긴다. 소금은 후식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관장하고 설탕은 온전히 디저트의 세계에 머문다. 여기서 ‘산미’는 코스의 전 과정, 즉 ‘짠 음식’과 ‘달콤한 음식’ 두 세계를 모두 오가며 맛의 ‘허리’를 곧추세우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산미의 진가는 단순히 음식을 새콤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맛의 전체적인 ‘표정’을 뚜렷하게 만드는 데 있다. 외국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 우리가 음식에 깨소금을 습관적으로 뿌리듯이 그들은 종종 요리의 마지막을 레몬즙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행위의 의미는 다 만든 요리를 일부러 시게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식의 전체적인 ‘해상도’를 선명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나서 자동보정 버튼을 누르면 색깔과 선명도가 미묘하게 짠 하고 밝아지는 느낌으로 이해하면 편하다.
맛에 있어서 산미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마리아주(페어링) 이야기로 확장되는데, 서양 식사에서 와인을 곁들이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와인의 역할은 음식과 어울리는 향미의 조합을 논하기 이전에, 식사에 부족한 수분을 곁들이는 것과 동시에 와인의 ‘산미’가 음식을 돋보이게 해 준다는데 본질적 의미가 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또 한세월이 걸리니 마침 소재도 바닥나고 있겠다 다음 편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아무튼 먹고 마시는데 ‘산미’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여러 소재들을 거쳐 썰을 풀어 드렸다. 그러니 당연히 오늘의 메뉴 또한 산미가 맛의 주연으로 나서는 요리다. 바로 ‘샐러드’다. 언제나 거창한 썰에 비해 막상 레시피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컨셉도 잘 지켜 나가고 있다.
세상에는 실로 수많은 종류의 샐러드가 있다. 카프레제나 시저 샐러드 같은 국제적 입지를 차지한 것부터 무늬만 샐러드인 치킨텐더 샐러드, 추억의 마요네즈 사라다까지 세상의 수많은 요리들이 ‘샐러드’라는 이름을 빌려 나름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경험한 인상 깊은 샐러드는 아사도르 에체바리(Asador Etxebarri)에서 스테이크와 함께 나온 단순한 그린 샐러드였다. 당시 2021년 ‘월드베스트레스토랑’에서 2위를 차지하며 안 그래도 충분히 유명했던 에체바리의 위세가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르는 시점이었다.
좀 놀랍지 않나? 이게 세상에서 첫 번째로 날아가는 솜씨를 자랑하는 레스토랑에서 내는 샐러드다. 첫 번째로 너무 성의 없어 보여 놀랍고, 두 번째는 사람 당황스러울 정도로 맛있어서 놀라웠다. 풍성한 지방을 그대로 살려 터프하게 구워 내는 스페인식 스테이크(출레타)와 함께 나오는데 그 무거운 지방에 전혀 밀리지 않는 샐러드의 크런치함과 산미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레스토랑 앞마당에서 바로 뽑아온 상추에 바스크 지역의 백포도 ‘온다리비 수리’로 만든 식초, 북부 리오하에서 생산된 올리브 오일 단 3가지 재료만을 쓴다. 오늘의 주제 ‘산미’가 제 역할을 멋지게 해내는 심플한 그린 샐러드의 아주 좋은 예시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 저 에체바리의 그린 샐러드를 하면 입만 살아 움직이는 필자의 게으름이 너무 티가 많이 나므로 약간만 수준을 더 높여보자. 샐러드의 개념을 재정립한 역사적인 요리이기도 하다. 바로 프랑스의 살아있는 전설 미셸 브라(Michel Bras)의 시그니처 디쉬, 푸디라면 한 번쯤 은 들어 봤을 법한 ‘가르구이유’(Le Gargouillou)다.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음식은 온전히 맛으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순수주의자도 이런 멋진 디쉬를 만나면 “역시 요리는 오감을 위한 종합예술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갑자기 또 극단적으로 난이도가 높아진 거 아니냐 싶겠지만 중요한 것은 가르구이유의 조리법이 아닌, 이 샐러드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있다.
이 아름다운 샐러드는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가르구이유"라는 이름은 미셸 브라의 시그니처 요리이기 이전에 그의 고향, ‘라기올’ 지방의 전통 야채수프에서 유래한다. 이 전통 수프는 지역 농민들이 주로 먹던 음식으로 다양한 채소와 함께 훈제 햄을 넣어 끓인 요리다. 이 가르구이유를 실제로 찾아가서 먹어본 사람들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인데, 그래서 이 화려한 샐러드 사이에 한 두 개의 훈제 햄 조각들이 유머스럽게 섞여 있다. 그래서 먼저 이 요리는 ‘전통 수프’에서 받은 영감을 ‘샐러드’라는 전혀 다른 카테고리에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러나 이 샐러드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시각’이 아닌 조리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바로 계절에 따라 그날그날 지역에서 재배 또는 채집된 수십 가지의 채소들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조리한다는 점이다. 고작 샐러드 하나에 말도 안 되는 노동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샐러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맛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다. 바로 샐러드란 이름 하에 하나의 드레싱으로 덮여져 왔던, 각각의 재료들의 ‘개별성’에 드디어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각각의 개성이 존중된 요소들의 합으로 ‘구성’된 샐러드는 한 요리사의 출중한 실력이나 독창성을 말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합이 뿜어내는 광경은 바로 라기올의 전경, 한 인간의 고향에 대한 애착이자, 자연과 요리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매개되어 있는 지를 은유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나아간다. 그래봐야 손 많이 타서 예쁜 샐러드 하나가 프랑스 요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는, 요리가 궁극적으로 닿는 지점은 혀가 아닌 예술과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미션은 ‘가르구이유’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온전히 취해, 샐러드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목소리가 살아있으면서도 드레싱의 산미가 이 모두를 부드럽게 아우르고 북돋아주게 만드는 데 있다. 우리는 미셸 브라처럼 텃밭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살짝 슬프지만 그냥 냉장고를 열어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기로 하자. 아주 기본적인 재료들을 사용하되 그러나 그 재료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구이’와 ‘절임’의 테크닉을 차용한다. 이름은 <구이 야채 샐러드>로 멋 부리지 않고 약간 심심하게 지어보자.
< 레시피 >
1. 구이 : 양파, 파프리카, 가지, 호박
구이는 열을 가함으로써 맛을 농축시키고 색과 향, 텍스쳐를 변화시키는 재료의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적극적인 방식이다. 전체적으로 요리의 중심을 잡는 무게감과 복합미를 기대한다.
파프리카, 가지, 양파 그리고 적당한 크기로 썬 호박에 올리브 오일과 소금을 뿌려 180도씨 오븐에서 1시간 익힌다. 파프리카는 원한다면 미리 직화로 까맣게 태워 스모키 함을 더할 수 있다. 불장난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가능하면 혼자 있을 때 하도록 하자. 잘 익은 파프리카와 가지는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 파프리카 위에 가지를 채워서 말아준다. 양파는 그대로 사용하기보다 역시 한쪽 면을 팬 위에서 살짝 태워 색깔과 향을 더해준다. 이 레시피는 정확하게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샐러드 ‘에스칼리바다’ 이기도 하다. 어디서든 구하기 쉬운 기본적인 야채들, 그리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한다는 우리의 의도에 적합해 차용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유출되는 모든 즙을 보관하는 것이다.
2. 절임 : 당근, 오이
반면, 절임은 기본적인 재료의 신선함과 가벼움을 유지함으로써 자칫 묵직한 구이 야채로 인해 샐러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정신 차리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당근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봤을 법한 ‘당근라페’ 레시피를 활용한다. 이름은 거창해 보이지만 그냥 소금에 충분히 절인 당근에 머스터드, 후추 등 가벼운 향신료를 더한 심플한 샐러드다. 역시 절이는 과정에서 나오는 당근의 즙은 잘 보관해 둔다. 오이도 얇고 길게 채칼로 썰어 소금에 가볍게 절여 둔다. 마찬가지로 즙을 잘 보관한다.
3. 드레싱 : 식초 + 올리브오일 + 구이와 절임 과정에서 유출된 모든 즙
그리고 이 두 가지 테크닉을 통해 각자의 개성이 드러내는 재료들을 ‘샐러드’라는 지붕 아래 두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선명한 산미에서 나오는 드레싱의 힘이다. 여기에 오늘의 포인트가 있다. 야채를 굽고 절이는 과정에서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모든 즙을 드레싱으로 활용한다. 여기에 식초 1, 올리브 오일 3을 기준으로 맛을 보면서 짠맛과 산미를 조정한다. 이것은 오일과 식초 베이스의 심플한 드레싱에 복합미를 더해주는 것 이상으로, 야채들이 가지고 있던 영혼을 온전히 보존하고자 하는 철학적 자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요리사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답을 한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버리는 게 없는 요리사”라고 대답할 거다.
이렇게 소박하나마 오늘의 재료들이 잘 모였으면 예쁘게 플레이팅 할 차례다. 우리 요리의 영감이 ‘가르구이유’에서 시작되었으므로 미쉘 브라의 스타일을 오마주해서 접시에 아방가르드하게 담아보자. 그냥 대충 무심하게 툭툭 담으면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의 선명함과 밸런스이므로, 야채들의 영혼을 품은 드레싱의 산미를 아끼지 말고 넣어주자. 이 외에도 베리 등 계절에 맞는 각종 과일이나 치즈, 견과류 등을 곁들여도 나쁠 건 없다. 나는 텃밭 대신 냉동실에 굴러다니던 완두콩을 삶아서 추가했다. 다만, 언제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잊지 말고, 원하는 요리가 추구하는 맛의 정체성을 고려해 재료를 가감하도록 하자.
나는 가끔 기분이 처질 때면 ‘라따뚜이’를 본다. 나의 훼이보릿 씬은 영화의 말미 독선적인 평론가 ‘이고’가 라따뚜이(프랑스식 야채 구이)를 먹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는 어디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말하는 장면이다. 예술은 자아의 비타협적 표현이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개인의 독단성에서 시작된다. 하여, 예술은 기본적으로 독불장군의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왕따의 삶으로도 모자라 보통은 곤궁해지기까지 한다. 미셸 브라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면서 동시에 부와 명예까지 획득한다.
우리 모두는 고유의 맛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강력한 샐러드드레싱 같은 삶의 압박 앞에 대부분은 자신의 이름보다 가족과 조직이라는 이름의 방패를 앞세워 살아간다. 그리고 대개 그 시간들은 내 목소리의 양보와 희생을 요구한다. 삶을 뒤덮는 날카로운 세상의 목소리를 연어처럼 거슬러 오르며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는다. 세상의 눈치 살피며 사는데 익숙한, 우리 모두가 비록 예술가로 살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삶을 예술로 만들 수는 있다고. 역사에 획을 긋는 ‘가르구이유’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드레싱에 파묻히지 않는 ‘구운 파프리카 1’ 정도로는 살겠노라 다짐한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소심한 독불장군 같은 시간들이 모이다 보면, 어느 순간 라기올의 전경 같은 마법 같은 장면이 내 눈앞에도 펼쳐질지. 세상의 기대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그 압박을 온전히 예찬할 수 있을지 말이다. 그래서 은근한 탄내가 스며든 야채 구이를 씹으며 조용히 읊조려 본다. ”인생 빠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