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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Jan 23. 2018

청춘의 마지노선

"내가 일곱 살 때 얼마나 여덟 살이 되고 싶었는데"

여덟 살이 돼서 뿌듯한 아이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이제 몇 살이야?" "서른아홉 살." 작년에도 서른아홉 살이라고 했는데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서른아홉 살인 아빠를 보며 아이는 고개를 갸웃한다. "왜 아빠는 늘 서른아홉 살인 거야? 거짓말하면 안 되는 거야." "아빠는 아빠니까 그래. 계속 서른아홉 살일 거야." 이 터무니없는 설명에도 아빠를 무한신뢰하는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아이보다 서른 살을 더 먹었고, 남편은 나보다 네 살을 더 먹었다. 절대 좁혀질 수도 그렇다고 더 늘어날 수도 없는 나이의 간격. 하지만 남편은 언젠가부터 이 간격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있다.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과는 별개로 홀로 서른아홉 살에 멈춰있는 거다. 왜 꼭 서른아홉 살인 거냐며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청춘의 마지노선이란다. 이삼십대라고 통칭되는 청춘의 마지막 자리를 꼭 붙들고 싶다고 했다. 


청춘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 말에 이리 연연하는 것일까. 여덟 살 딸에게 이해하지 못할 혼란을 주면서까지 말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서른여덟 살의 나이가 아무렇지 않은 내게 청춘은 어떤 의미일까?


청춘이라는 말은 나를 스물세 살로 데려다주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법관이 되고 싶어 했던 나는 의심 없이 법대에 진학했다. 2학년이 되자 망설임 없이 사법고시 준비도 시작했다. 휴학을 하고 2년 동안 공부만 한 뒤 나는 사법고시 공부를 끝냈다. 그렇다고 내 꿈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법관이 되고 싶었던 이유, '정의로운 삶'에서 답을 찾기로 한 거다. 시민단체를 찾아가 자원활동가 활동을 하기도 하고, 온라인 신문사를 만들겠다는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꿈을 포기한 거냐고 물었던 스물세 살. 나는 학교 밖에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그 여러 시도들이 다 근사한 결말을 맺지는 못해 지금은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지만.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고 서른여덟 살이 되었다고 꿈을 향한 발걸음을 멈춘 것은 아니다. 이제는 또 다른 이유로 꿈을 향해 걷고 있다.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아이 때문이다. 아이는 자주 묻는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엄마는 커서 뭐가 될 거야?" 처음 아이에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모습을 내 꿈인 양 말했다. "왜 되고 싶어?" 이어지는 아이의 질문에 내 대답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엄마의 바람이라고 대답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때 다시 생각했다. 나는 정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그래서 이제는 정말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작가가 되고 싶어. 엄마는 글 쓰는 걸 좋아하거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하니까."


내가 쓰는 글이 그리 대단하지 않음도 알고, 어쩌면 아무도 좋아해 주지 않을 수 있음도 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원하는 일이니까. 포기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다 보면 어떤 결말이든 맺게 되지 않을까. 그게 설령 진짜 작가가 되는 일은 아니더라도 엄마는 끝까지 청춘이었음을,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여전히 서른아홉 살에 머물러 있는 남편에게도. 


물리적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아직 나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 그래서 꿈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그건 청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서른여덟 살인 나도 청춘이고, 올해는 자전거로 국토종주를 꼭 하겠다는 마흔두 살의 남편도 청춘이다. 그렇게 아이는 내게 청춘의 마지노선을 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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