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보고 싶어.”
“엄마도 우리 딸 보고 싶어.”
“그럼 빨리 올 거야?”
“미안해. 엄마가 오늘은 빨리 못가.”
월요일에 출근해 화요일이 돼서야 사무실을 나왔던 날 저녁. 딸과 영상통화를 했다. 딸은 나의 미안하다는 대답에 울먹이기 시작했고, 나는 화제를 전환해야 했다.
다음 날 야외 견학 수업이 있던 딸에게 간식 도시락은 내 숙제였다. 무엇을 싸주면 좋겠느냐 물었더니 딸은 포도와 바나나를 주문했다. 포도는 예측 가능한 대답이라 미리 새벽 배송을 시켜놓아 다행이었지만, 바나나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과일이기에 냉큼 그리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딸은 바나나가 뭐라고 눈물을 닦고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로비를 들어서는데 불현듯 딸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머리가 띵한 것이 감기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잠깐 망설였다. 미안하다고 하고 바나나를 싸지 말까. 이미 저녁에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미안하다고 또 말해야 하는 상황은 싫어서 아파트 입구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엇, 바나나가 보이지 않는다. 떨어졌단다. 길 건너편 편의점에도 바나나는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또 망설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한 군데를 더 가볼 것인가.
두 군데 돌아봤으면 충분하지.
두 곳이나 바나나가 없으면 그것은 딸의 운명이지.
이 늦은 밤에 일부러 걸어가 봤으니 엄마 도리는 다한 거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아파트 정문을 지나쳤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24시간 마트를 가보기로 했다. 그곳에도 없으면 거기서 또 5분을 걸어 다른 편의점까지 가보기로 했다. 주변에 있을 만한 곳을 모두 돌아보고도 없으면 그때 딸의 운명이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왕복 20분, 혹은 그 이상의 시간보다 딸과의 약속이 훨씬 더 소중하니까. 일찍 퇴근은 못 해도 약속은 지키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띵한 머리, 으슬으슬한 몸은 잊혔다. 목적지를 향해 잰걸음으로 걸었다. 경보 선수라고 해도 될 속도였다.
과일 코너로 들어서는데 노란 뭉치가 보였다. 식구 수가 적으니 늘 제일 적은 뭉치를 골랐는데 오늘은 예외였다. 제일 큰 뭉치를 골랐다. 지친 표정으로 느릿느릿 계산하는 종업원에게 괜한 말을 걸었다. 새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이톤으로. 바나나를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모른다고, 24시간 영업해서 너무 다행이라고. 종업원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결국 바나나를 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마트 문을 나서며 아침에 딸에게 할 말을 떠올렸다. 이 바나나가 얼마나 귀한 바나나인 줄 아느냐고. 엄마가 새벽에 30분 넘게 3곳을 헤매서 사 온 것이라고. 그러니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마트에 올 때는 잰걸음이었지만, 돌아가는 길은 느긋하게 걸었다. 송글송글 맺힌 땀이 식고 다시 몸이 으슬으슬했다. 기분은 좋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단지 몸이 피곤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집으로 향하며 불편함의 이유를 알게 됐다. 딸에게 내 노력을 알아달라고 강요하려 했던 마음 때문이었다.
그저 엄마는 딸과의 약속을 소중히 생각하고 기쁘게 지키는 사람으로 남으면 될 일이었다. 고생했다며 생색내고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강요할 일은 아니었다. 고생이 아니라 기쁜 노력으로 마음을 먹고 나니 불편한 마음이 사라졌다. 보이지 않던 달이 말갛게 눈에 들어왔다. 내일 날씨가 좋겠지 싶어 마음이 더 환해졌다. 식탁 위에 바나나를 올려놓으며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 가벼운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엄마, 바나나랑 포도랑 쌌어?”
“응!”
딸은 일어나자마자 간식 도시락을 확인하고,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짧은 대답 외에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말과 글 또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딸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잘 지키는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딸이 자연스럽게 약속의 소중함을 깨닫기를 바랐다. 지금은 깨끗하게 빈 도시락통으로 돌아와 간식이 너무 맛있었다며 활짝 웃는 아이의 얼굴만으로도 충분하다. 으슬으슬에서 욱씩욱씬으로 심해진 감기가 무엇 때문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단지 이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 이렇게 걸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제목의 사진은 Unsplash의 Anastasia Erem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