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방
위스키보다는 와인이 좋고, 와인보다는 막걸리가 좋고, 막걸리보다는 소주가 좋고, 소주보다는 맥주가 좋다. 가격도 도수도 부담 없기에 맥주를 제일 즐겨 마신다. 하지만 맥주보다 더 좋아하는 술은 연태고량주이고 그보다 더 좋아하는 술은 수정방이다.
연태고량주와 수정방은 맛의 결이 비슷하다. 투명한 술이 담긴 잔을 입에 대면 은은한 과일향이 기대감을 높이고 독주답게 넘어가는 길을 뜨겁게 태우며 설핏 구겨지는 미간을 달래듯 다시 과일향이 올라온다. 물론 두 술은 대략 15배 정도 가격 차이가 나기에 술이 머금은 열기와 향에는 차이가 있다. 더 비싼 수정방이 더 뜨겁고 더 향긋하다.
투명한 술이 눈물 같고, 뜨거운 맛이 슬픔을 태우는 것 같고, 달콤한 향이 아픔을 달래는 것 같아 우울한 날이면 더 찾게 된다. 내 기준으로는 숙취까지 없으니 우울에 기대어 조금 과하게 마셔도 다음 날이 그리 걱정되지 않기에 더 좋다.
불꽃이 일 듯 파르르 피어나던 사랑을 꺼뜨리고 나서 연태고량주를 마셨고, 맹목적으로 매달려 쟁취한 오랜 사랑과 헤어졌을 때 수정방을 마셨다. 물론 다른 때에도 다른 기분에도 연태고량주와 수정방을 마신 적이 있지만, 이별을 곱씹으며 마셨던 날들은 쉬이 잊히질 않는다.
연태고량주를 마시며 다음에 올 사랑은 연태고량주 같기를 바랐다. 달달하고 뜨겁고 그럼에도 아프지 않기를. 수정방을 마시며 다음에 올 사랑은 수정방 같기를 바랐다. 찌질하지 않고 고급스러우며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향을 남기기를.
마지막 사랑이기를 바라는 남편과 연애를 하며 곧잘 연태고량주를 마셨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수정방을 샀으니 내 바람은 이뤄진 것일까. 부부의 연을 맺은 지 14년 차. 이제는 각자의 취향과 경제 사정을 고려해 남편은 소주, 나는 맥주를 마시지만 어느 날 불쑥 남편이 수정방을 들고 집에 오면 좋겠다. 그 술값이 아깝지 않도록 기분 좋은 소식도 함께 라면 더없이 좋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