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하얘지고 반질거린다며 칭찬했지만 내게는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자연 아래 고스란히 노출될 기회가 없었단 말이기에 외려 옅은 우울감이 밀려왔다. 진한 우울감은 아니라서 다행인 걸까. 아니, 옅은 색도 덧칠하다 보면 진해지기 마련이니 위험 신호였다. 다행히 눈치 빠른 남편은 말을 더 이어가지 않았다. 잘못하다 내가 쏟아내는 서울 불만족 독박을 쓸지도 모르니까.
15년 다닌 직장을 퇴사한 것도 내 의지, 퇴사하자마자 제주살이를 선택한 것도 내 의지였다. 하지만 서울로 다시 돌아온 것은 내 의지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주말부부로 4년 동안 홀로 서울에서 고생한 남편 때문이었고,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는 사춘기의 딸 때문이었고, 주말부부에 대한 친정과 시댁 어른들의 걱정 때문이었다.
4년 동안 여유롭게 사는 법을 터득했으니 사는 장소는 크게 중요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혼자가 아닌 가족이 있는 삶을 택한 것도 나이기에, 내키지 않아도 가족을 위해 서울로 돌아오는 것 역시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사 후 한 달이 지난 지금, 사는 장소가 중요하다는 사실만 거듭 확인하고 있다.
도심에서 찾아 나선 봄
나무보다 높은 고층 아파트에 둘러 싸인 곳에 사는 것, 걸을 때 고요함은 어디 가고 차소리가 가득 찬 곳에 사는 것, 바다 내음, 숲 내음 대신 매캐한 공기가 흔한 곳에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오감이 자연에 너무 물들어 도심을 밀어낸다. 그러니 자꾸 집에서 책으로 빠져든다. 세 달 동안 읽을 책을 한 달 만에 다 읽은 듯. 곱씹고 마음에 새기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정독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도망가는 속독이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독서다.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볼까 싶어핸드폰을 들었다가도 결국 연락하지 않게 된다. 서울에서 쭉 살아온 사람들과 만나면 대부분 서울살이 적응을 강요받다가 끝나니까.
서울살이가 어떠냐고 물어서 제주가 그립다고 답하면 열에 여덟은 잘 놀다 왔으니 이제 서울에 잘 적응해야 한다고 한다. 4년이면 충분히 오래 살았다고, 4년 동안 쌓은 추억이면 충분하다고, 서울살이가 편하고 좋다고. 4년도 부족하던데, 제주에서 놀다 온 것이 아니라 살다 왔고 글도 열심히 썼는데, 외려 복잡해서 서울이 불편하던데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말을 삼킨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어차피 제주에서 나처럼 살아보지 않은 이들이 내 삶과 마음을 오롯하게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기에.
많은 말들 중 가장 이해되지 않는 건, 남들이 충분히 부러워할만한 다른 선택을 누렸으니 이제는 남들과 비슷하게 살라는 말이었다. 내가 선택한 내 인생인데 왜 남과 비교해야 할까. 욱하는 마음에 서울에서도 남들과 다르게 살 거라는 말을 툭 뱉기도 했는데, 현실 모르는 철부지가 되고 말았다. 분명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 일 텐데, 내게는 편 가르기로 들렸다. 지금까지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다른 편이었으니 이제 그 방식이 현실과 동떨어졌음을 인정하고 우리 편이 되라는. 나는 그냥 내 편일 뿐인데 말이다.
편 가르기를 나의 오해라 치더라도 사람들은 참 급하기도 하다. 사실 내게 서울살이가 어떠냐고 물을 때 내가 제주가 그립다고 대답하면 4년 살다 왔으니 그립기도 하겠다며 내 마음을 인정해 주면 될 텐데, 대부분 벌써 적응을 논한다. 모든 것을정리하고 돌아왔으니 제주로 다시 가고 싶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빨리 서울을 좋아하기를 바란다. 서울에 불만족하면 큰 일 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울의 장점을 열거한다. 제주에 가기 전 20년을 서울에서 살았는데 설마 그 장점을 내가 모를까. 그 장점 다 알지만 그보다 더 좋은 장점을 제주에서 발견해 그러는 건데.
서울에서 시작한 놀이, 도서관 탐험
서울로 돌아온 지 두 달이 가까워 오는 지금, 섣부를지는 모르지만 결론을 내렸다. 서울을 좋아하기는 힘들겠다고. 고작 자연이 멀어져서 그러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자연도 멀어졌고, 유사성을 강요받는 도시라는 느낌 탓이다. 하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니 서울에서도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을 거다. 살기 싫은 장소에서도 꿋꿋하게 재밌게 사는 사람이 되고 말겠다. 이왕이면 유사성을 거부하며 남들과 다르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