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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Mar 14. 2024

아침마다 산책하던 제주도민이 서울시민이 됐더니

제주에서 아이는 8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면 짧게는 10분, 길게는 한 시간 이상의 산책을 했다. 오전 일정에 따라 산책 시간을 가늠하고 코스를 정해 천천히 걸었다. 이때 다양한 맵에서 안내하는 도보 시간을 신뢰해서는 안 됐다. 평균보다 느린 속도로 걷고, 때론 머무르기도 하고, 때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기에 나만의 속도로 예측한 코스를 택했다.      


2월에 서울로 이사하고 나니 겨울이었다. 제주보다 바람에 힘은 빠졌지만 공기의 차가움은 강했다. 뼈를 때리듯 바람이 불지는 않았지만 뼈에 스며드는 한기는 오싹했다. 게다가 아이가 집에 머무는 방학이라 아침 산책을 미룰 핑계도 있었다. 당연하던 아침 산책이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3월이 됐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7시 50분에 집을 나섰고, 주말부부 생활을 끝내고 매일부부가 된 남편은 8시에 집을 나섰다. 8시부터는 자유부인이 되는 나. 제주에서보다 더 일찍 혼자 남게 됐으니 더 여유롭게 산책에 나서면 될 텐데 아직 아침 산책은 하지 않고 있다. 3월이어도 여전히 춥다는 것도 이유고, 마음을 당기는 산책 코스가 없다는 것도 이유다.      


내가 제일 사랑했던 제주 동네 산책길의 풍경

제주에서는 10분을 걸어도 바다를 보며 걷고, 30분을 걸으면 녹차밭을 만나고, 한 시간을 걸으면 숲을 걷게 되는데 주변이 온통 아파트뿐이니 걸을 맛이 나지 않았다. 물론 아파트 사이를 20분 남짓 걸으면 공원이 나오기는 하지만 아파트 사이를 걷는 게 뭐라고 나서지 않게 됐다. 아직 서울살이를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가족이 빠져나간 집에서 나 역시 작가로 출근하겠다며 바로 노트북을 켜기는 싫었다. 산책을 하며 내 마음을 살피고 속도를 늦추며 하루를 시작했던 것처럼 서울에서도 비슷한 장치가 있었으면 했다. 다들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는데 너만 유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강박과 이왕 할 일이라면 완벽하게 하고 싶은 욕심이 큰 사람이라 곧잘 급해지고 곧잘 무리하기에 나를 느슨하게 풀어주는 장치는 꼭 필요했다. 강박과 욕심에 치여 무리했던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기에 행복하게 살기 위한 애씀이기도 하다.      


미세먼지가 심해 아이의 비염도 심했던 날, 아이는 내게‘백차’를 끓여달라고 했다. 따뜻한 차로 뻑뻑한 코를 촉촉하게 하고 까슬까슬한 목을 부드럽게 하고 싶다며. 그리고 이날부터 내게는 제주에서의 산책을 대신할 서울에서의 아침 루틴이 생겼다. 바로 ‘백차’ 우리고 마시기.     


제주에서도 ‘백차’를 마셨지만, 산책을 다녀와 마시거나 외출하고 돌아온 뒤 마시는 등 루틴 없이 마시고 싶을 때 마셨다. 아침에 끓여서 학교 가는 아이 보온병에 챙겨주며 나 역시 보온병에 챙겨 산책하다 마시기도 했지만 가끔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매일 아침 백차를 마신다.     


오늘 서울에서의 아침 풍경

아이 아침을 챙겨주고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물이 끓을 동안 전자저울을 꺼내고 찻잎 뭉치를 꺼내 6~7g을 덜어낸다. 찻주전자에 덜어낸 찻잎을 넣고 여러 번에 걸쳐 차를 우리는데, 첫 번째는 아이 보온병을 채우고, 두 번째는 1L 유리병을 채우고, 마지막으로 내 찻잔을 채운다.     


막 우린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서 뜨거움을 품은 채 마시고 싶지만, 아직 아이와 남편이 집에 머무니 그 욕심은 살짝 내려 둔다. 아이는 아침을 먹으며 책을 읽고, 남편은 그 시간에 씻고 있으니 차를 우리는 동안만큼은 고요히 머물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내 찻잔이 채워지고 25분 남짓 흐르고 난 뒤 드디어 나는 홀로 남은 집에서 찻잔을 손안에 품게 됐다. 보온병의 쇠맛이 섞이는 게 싫어 도자기 컵에 따랐는데 다행히 온기는 남아 있었다. 먼저 코로 향을 깊게 마시고 차를 입에 머금었다. 한 번에 꿀꺽 삼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입에 머무르게 두었다가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입이 비워지고 나면 곧바로 다음 모금을 머금지도 않았다. 잔잔하게 혀끝에 남은 단맛을 느끼고 그 달달함이 옅어질 때 다음 차를 머금었다. 느릿하게 걸었던 만큼 느릿하게 마셨다.     

 

아이가 밥을 먹고, 씻고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오르락내리락하는 마음을 차로 진정시키겠다며 벌컥 들이켠 적도 있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다독임 없이 ‘진정해’라고 나를 다그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정말 천천히 ‘백차’를 마신다. 음악을 듣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차와 나, 단둘이 남아서 내 마음을 살핀다. 마음을 살핀다는 건 내가 품고 있는 감정을 깊게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그냥 나를 텅 빈 채로 놔두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실 무엇을 쓸까, 어떻게 쓸까 이리저리 궁리하는 것이 일이기에 차를 마시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날이 더 잦다.      


차를 다 마셔도 9시가 되지 않은 서울의 아침. 창밖의 공기가 온기를 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차를 마신 뒤 찻잔을 싱크대에 넣어두고 노트북을 켜거나 책을 펼쳤지만 어쩌면 다음 주에는 차를 마신 뒤 밖으로 나설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아파트 사이를 걷기는 싫지만, 차로 온기와 여유를 채우고 나서는 길에는 싫음을 견딜 힘도 아파트 사이에 꼭꼭 숨은 다정함을 발견할 세심함도 갖춰지지 않을까. 차가 주는 여유에 산책의 여유까지 더해 서울에서의 아침을 더 근사하게 시작하리라 다짐해 본다. 그러고 나면 서울살이를 온전히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겠지.



※ 제목의 사진은 2023년 3월 14일 산책 중 남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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