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나는 작가가 됐다. 단지 퇴사만 한 것이라 아니라 전직했다. 직업을 작가로 선택한 후 평일에는 무조건 글을 쓴다. '최소 두 시간 이상'이라고 정해놓고 대부분 지키고 있다. '최소 두 시간 이상'이라는 약속에는 오로지 글만 포함된다. 자료 조사, 독서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게 쓴 글이 모여 책이 됐고, 책을 출간한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다.
제주집 베란다 풍경
작가로 직업을 전직하자마자 제주로 떠났다. 처음에는 집에서 글을 썼다. 아이가 학교에 간 조용한 집에서 블라인드를 끝까지 올려 창밖의 풍경을 고스란히 마주하며 썼다. 베란다에서 손을 뻗으면 벚나무를 만질 수 있었고, 조금만 멀리 시선을 두면 수국이 폈고, 짙은 초록잎 사이에서 하얀 은목서가 존재를 드러냈다. 계절마다 마음을 붙드는 꽃이 글에 감각을 더했다.
카페에서 바라보는 풍경
꽃이 지고 다음 꽃이 피기 전에는 초록잎에 시선을 두다가 그마저 싫증이 나면 집을 나섰다. 차로 15분만 내려가면 에메랄드빛 함덕 바다가 내 마음을 들썩였다. 게다가 함덕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저렴한 카페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서울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제주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1층에 주문대와 조리 공간이 있고 2층에는 좌석만 있어 눈치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리세라는 것이 있으니 커피에 베이글 더했다. 베이글까지 시켜도 다른 카페 커피 한 값이니 부담이 없었다.
타타타닥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다 글이 막히면 바다를 눈에 담았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보기도 하고 해변을 걷는 사람들을 살피기도 하고 바다 색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가늠해보기도 했다. 매일 보는 바다여도 매일이 달라 질리지가 않았다. 같은 듯 매번 다른 바다는 멈췄던 생각을 밀려가게 했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은 바빠졌다.
나무를 보고 꽃을 보고 바다를 보며 글을 썼다. 글이 막히면 자연을 눈에 담았고 자연을 헤아리다 보면 감각은 세밀해져 다시 글을 나아가게 했다. '최소 두 시간 이상'이라는 글쓰기 시간을 잘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이라는 글벗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글이 막히면 자연이 답답함을 덜고, 글이 쓰기 싫으면 자연이 같이 놀아줬기에 엉덩이 무겁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제주살이 4년 중 첫 해를 제외하고 3년은 '평일에는 최소 두 시간 이상 글을 쓰겠다.'는 다짐을 어긴 날이 거의 없었다. 3년이란 시간은 글 근육을 키워 서울로 돌아온 지금도 매일 글을 쓰게 한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제주에서는 자연이라는 글벗이 있었지만, 서울에는 없다. 집에서 글을 쓰려고 해도 베란다 너머로는 아파트만 보인다. 물론 하늘이 삐쭉 보이기는 하지만 뿌연 날이 잦다. 감탄하는 대신 한탄하게 된다. 카페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자연을 한껏 누릴 수 있는 카페는 집 근처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글벗이 없는 글쓰기는 위태롭다. 표현은 자주 막히고 쓰기 싫은 마음 역시 너무 잦게 찾아온다. 목표한 분량만큼 곧잘 써냈는데, 이제는 목표를 줄여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직업을 바꾸기는 싫고, 쓰고 싶은 이야기는 가득 차 있으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도서관을 가야겠다. 서울에는 곳곳에 다양한 도서관이 많으니 도서관 탐방과 글쓰기를 결합해야겠다. 눈을 들면 자연은 아니지만 책이 보일 테니, 수많은 책들이 샘나서 내 책도 저 사이에 꽂아두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다양한 책 제목들이 내 감각을 벼리게 하리라 믿으며 서울에서는 글벗을 도서관으로 둬야겠다. 제주에서는 글벗을 자연으로 뒀더니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라는 책을 쓰게 됐는데, 서울에서는 글벗을 도서관으로 두면 어떤 책을 쓰게 될까.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와 결을 맞추려면 어떤 도서관부터 가봐야 할까. 뭐든 새로운 궁리는 재밌다. 덕분에 서울살이에도 재미가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