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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넘어간 와인, 눈물로 끝나다

와인

by 여유수집가

초등학교 3학년 딸이 학교에서 음주흡연 예방교육을 받고 온 날, 집에는 갑자기 종이 한 장이 붙었다. 딸이 직접 만든 '우리집 음주 규칙'이었다.


우리집은 막걸리만 마실 수 있어요!
조금이라도 취하면 안 돼요!
단, 선유가 허락하면 맥주, 소주, 와인 반 잔만 가능해요.


막걸리는 식혜랑 비슷한데, 커피처럼 어른들만 마실 수 있는 음료수라는 내 말에 딸이 홀딱 속아 이런 포스터가 완성됐다. 아쉬운 건 와인이었다. 사실 와인이 우리집에서 가장 위험한 술이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딸은 와인을 '포도 주스에 가까운 어른 주스' 쯤으로 여겼다. 소주와 맥주는 이미 너무 자주 마셔 '술'이라는 걸 감출 수 없었지만, 와인은 가끔 마시는 술이라 철통 보안이 가능했다. 그런데 과욕이 모든 걸 망쳤다.


딸과 나는 제주에 살고 남편은 서울에 사는 주말부부 시절이었다. 오랜만에 서울집에 갔더니, 남편이 선물 받은 와인들이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전부 '고급 와인'이라며, 남편은 날 위한 선물이라고 했다. 달지 않고 입안에서 공간이 확 열리는 느낌. 맑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 딱 내 취향이었다. 고급인 걸 알고 마셔서였는지, 정말 맛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마시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천천히 마셔."


남편이 말렸지만, 말릴 타이밍은 이미 한참 지나있었다. 제주 시골에서는 배달도 안 되는 안주를 이것저것 시켜 먹는 재미에 '소주 한 병은 거뜬한데 와인쯤이야'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더해졌다. 첫 병은 금세 비웠다.


집에서 마시니 가게 문 닫을 걱정도, 귀가 걱정도 없었다. 딸은 잠옷을 입고 유튜브에 몰두해 있었고 남편도 옆에 있으니 안심이었다. 그러니 두 번째 병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 와인은 가격으로는 두 번째라지만 향은 더 짙고 목 넘김은 훨씬 부드러웠다. 잔을 굴리고 향을 음미하는 고상한 절차 따위는 없었다. 그냥 킁킁 한 번에 꿀떡꿀떡. 술이 너무 맛있으니 안주도 필요 없었다. 한 병 반쯤 마셨을 무렵, 남편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만 마시자. 취했어."

"취해도 되지 뭘."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남편이 딸을 챙겨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말에만 제주에 오는 남편이기에 평일 제주에선 늘 내가 정신을 붙들고 있어야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를 대신해 줄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비싼 와인이니 남길 수가 없었다. 결국 두 병을 비운 나는 양치만 대충 하고 침대에 다이빙하듯 누웠다. 딸이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꿈쩍도 하지 않았단다. 평소처럼 성가를 함께 부르며 잠들려고 했는데 옆에서 꼼짝 않고 쓰러져 잠든 엄마를 보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고.


"엄마 왜 이래!"


내 팔을 잡아당기고, 간지럼을 심하게 타는 나를 마구 간질여도 소용없었다. 결국 아빠에게 달려가 "엄마가 이상해"라며 서러워했다는 후문이다. 딸의 대성통곡은 나의 숙면 앞에서 무력했다. 나는 꿈도 꾸지 않고 아주 깊고 고요하게, 그 밤을 통째로 건너갔다.


다음 날 아침, 딸은 내게 와인 금지령을 내렸다. 와인은 더 이상 '우아한 어른의 음료수'가 아니었다. 엄마를 엄마가 아니게 만든 무서운 술이 되어버렸다. 짙은 보랏빛 유혹에 홀딱 넘어간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우아하게 즐길 수 있었던 와인이 우리집 최악의 술이 되어버릴 줄이야. 술술 넘어간다고 가볍게 여겼던 와인은 조심히 마셔야 하는 술이었다. 특히 두 병째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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