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분만 해도 됩니다

1.9인분을 1인분이라고 믿고 일하는 사람에게

by 여유수집가

전 직장동료들과 점심을 먹었다. 모인 사람은 다섯 명. 그중 나를 포함한 두 명은 퇴사했고 세 명은 여전히 회사에 남아 있다. 2019년 퇴사한 뒤 처음 보는 후배는 내가 퇴사할 때도 눈물을 글썽였는데 이번에도 나를 만나자마자 눈물을 보였다. 신혼이었던 후배가 이제 다섯 살 아들의 엄마가 될 만큼 시간이 흐른 만남이었다.


“책임님,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책임님 책이 다시 생각났어요.”


첫 책 『퇴근할까 퇴사할까』를 다시 꺼냈다는 후배. 그 책은 육아휴직 때 쓰기 시작해 복직한 뒤 출간한 책으로 ‘엄마라는 이름의 직장인’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며 주차장에 드러누워 등원 거부를 하던 딸, “회사 일은 혼자서만 하니?” 나를 타박하던 남편, 기어이 “엄마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라고 했던 딸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때 딸이 딱 지금 후배 아들의 나이였다.


전날도 밤 1시에 퇴근했는데 아침 6시 30분에 출근했다는 후배. 분기 결산 기간이라 바쁘다며 숫자가 맞지 않아 점심도 거를까 했었다는 그녀에게서 예전의 내가 보였다. 회사에서는 끝나지 않는 일 때문에 숨이 막혔고, 모두 잠든 집에 도둑처럼 살금살금 들어가며 숨을 죽였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편히 숨을 쉴 수 없었던 날들. 직원으로도 아내로도 엄마로도 다 부족한 것 같아 초라하던 나의 시절을 후배도 똑같은 모습으로 지나고 있었다.


회사에는 ‘1.9인분’이라는 말이 있다. 2인분의 일이 한 사람에게 몰리면 인력을 충원해 줘야 하니 그에 아주 조금 못 미치는 1.9인분까지 일을 시키며 최대한 부려 먹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누군가는 1인분의 일을 하고 누군가는 1.9인분의 일을 한다. 1.9인분의 일을 하는 사람은 대개 책임감이 높고 부장의 지시를 잘 수용하는 직원이다. 한번 1.9인분을 하고 나면 1.9인분이 1인분이 되어버리는 셈법이 회사 안에서는 너무 쉽게 작동한다. 나도 그랬고, 후배도 분명 그럴 터였다.


나는 이미 지쳐버린 뒤에서야 1인분만 해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1.9인분을 하며 받은 인정을 놓을 수가 없었고 조금만 더 버티면 나아질 거라는 최면을 걸었다. 회사에서 매번 120%의 에너지를 쓰다 보니 가족에게는 늘 쓸 에너지가 없었다. “엄마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라는 딸의 말을 타박할 수 없었다.


일곱 살이 되어서도 “오늘 또 늦어?”, “엄마는 나보다 회사가 더 좋은 거지?”라는 질문을 딸에게 들었고, 아홉 살이 되어서도 딸은 “왜 이렇게 늦게 와?”를 물었다. 달라지지 않는 질문 앞에서 내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퇴사했다.


강연에서 퇴사하고 가장 후회하는 한 가지가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내 에너지의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점이라고 답했다. 일을 잘하고 싶었던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그 진심의 기준이 타인의 인정에 있었다. 부장님이 “할 수 있지?”라고 물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상무님이 “믿고 맡긴다”라고 말하면 그 믿음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 에너지의 한계를 남의 판단에 맡겼던 게 잘못이었다.


일에 대한 책임감이 높았던 기억 속 후배는 지금도 여전히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오랜만의 만남을 눈물 바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과의 소란스러운 대화에 섞여 들었다.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후배에게 점심을 먹으며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 글에 담아 보낸다.


오늘의 완벽보다 중요한 건 다음 달도, 그다음 달도 이 일을 이어갈 수 있는 적절함이다. 매번 120%로 일해야 겨우 유지되는 일이라면 그건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너무 많은 몫이 주어져서다. 그러니 퇴사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딱 1인분만큼만 일해보면 좋겠다.


당연하듯 넘어오는 일 앞에서 “이건 지금 제 일정상 어렵습니다.”라고 말해보고, 기간을 당기라는 재촉 앞에서 “다른 업무를 조정해 주세요.”라고 요청해 보고, 너라서 맡긴다는 말 앞에서 “다른 직원도 충분히 가능합니다.”라고 위임도 해보면 좋겠다.


언짢아하고 실망하는 상사를 견디고 나면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말 나의 1인분인지, 아니면 1.9인분을 1인분이라고 믿으며 버티고 있는지. 지금 너무 지쳐있다면 의지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너무 많은 몫을 감당해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퇴사는 그걸 확인한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