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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시간을 기록하는 법, 산굼부리

아이와 제주

by 여유수집가

"엄마" 아이가 처음으로 나를 부른다. 옆에 있던 아빠의 마음이 급해진다. "아빠, 아빠" 어렵지 않다며 아빠를 말해보라 재촉한다. 그다음에는 "맘마". 필요한 것을 말해보라 하고, 그다음에는 우는 이유를 말해보라 하고, 이제는 기분이 왜 그런지 설명을 해달라고 한다. 그렇게 부모는 아이가 어서 자라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는 만큼 씁쓸하게도 부모는 늙어간다. 아이의 시간만 플레이를 해두고, 부모의 시간은 멈추고 싶지만 너무도 야속하게 너무도 공평하게 모두의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그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정말 없을까. 그 자리에 가만히 놓여 움직일 수 없는 비석마저도 바람에 비에 쓸려 조금씩 마모되어갈 것이고, 집 안 창고 저 구석에 처박힌 어떤 물건도 먼지가 쌓이고 쌓일 텐데. 그런데 자연은 변하지 않을 수 있더라. 나무가 자라고, 돌멩이도 구르고 구르다 모래알이 되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겠지만 멀찍이 물러나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그 웅장함은 늘 멈춰있었다. 그냥 푸르름 그 자체 그대로였다.


SAM_6771_11.jpg 2013년 5월의 산굼부리
SAM_9243_11.jpg 2015년 7월의 산굼부리

2013년 5월의 제주에서 산굼부리를 찾았다. 제주의 특색, 오름을 오르고 싶었고 유모차도 가능해야 하는 세 살 아이와의 동행이었기에 선택한 곳이었다. 그저 주어진 자연을 바라보러 가는 길에 비싼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 조금 모순이라 여겨졌지만 그만큼 오르는 길이 편안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2015년 7월, 다시 제주에서 산굼부리를 찾았다. 이제는 5살. 혼자서도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나이라 용눈이오름, 군산오름, 아부오름 등 여러 곳을 후보에 올려두었지만 숙소가 절물휴양림 근처라 이동 동선에도 맞고, 또 시간이 흐른 만큼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2년의 시간. 달라진 것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남편과 나는 시간이 흐른 만큼 탱탱함을 잃었고, 아이는 자랐고 그 사이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산굼부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2013년과 다름없이 푸르르고 짙었다. 시간의 흐름도 거스르지 못하는 인간은 자연 앞에서 정말 힘없는 존재임을 너무도 웅장하고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자연 앞에서 이렇게 작은 존재이면서 자연을 내 마음대로 어지럽혀도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웅장함은 단단함을 만든다. 이제는 산굼부리 표지석을 야무지게 읽는 아이가 더 자라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이 될 때에도 여전히 그대로인 자연을 보여주겠노라 결심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제는 시간이 흐를 때마다 탱탱함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잃어버리는 탱탱함 대신에 마음에는 넉넉함을 눈빛에는 따스함을 채우겠다고.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져 가겠다고. 그렇게 변함없는 자연은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내게 마음은 거스를 수 있는 지혜를 준다.


171717.jpeg 2017년 1월의 산굼부리

2017년 1월. 다시 산굼부리를 찾았다. 2015년의 내 결심은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성숙해져 가겠다는 나는 그저 늙어만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계절이 여름에서 겨울로 바뀌었기 때문일까. 선명하던 푸르름은 가라앉았고, 군데군데 갈색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대로일 줄 알았던 자연도 변한 것이다. 그렇다고 웅장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2년 전의 결심을 지키지 못한 내 시선이 투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물었다. 같은 곳을 왜 자꾸 다시 찾느냐고. 하지만 다시 찾아야만 했다. 무의미한 반복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결심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같은 곳을 다시 찾으며 우리 가족의 시간을 남기고, 내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의미가 깊었다. 아이의 자람이 내게는 성숙함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길. 그렇게 2017년의 나는 2015년의 나를 만나고, 2019년의 나를 떠올린다. 다시 산굼부리를 찾을 때는 잃어버린 것보다 채운 것이 더 많은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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