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주말아빠가 금요일 휴가를 내고, 목요일 밤 제주로 퇴근을 했다. 제주한달의 마지막을 함께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남편은 제주에서 보내는 네 번의 주말을 모두 함께 했다. 처음부터 한 달을 같이 보내기 위해 제주로 온 아빠 1명을 제외하면, 함께 한 달을 보낸 숙소의 여섯 집 중 유일한 매주 방문이었다.
한 주 정도는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아빠의 마음은 달랐다. 야근이 많은 엄마라 하이디는 나보다 아빠랑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 유치원 등원도 하원도 아빠와 함께였다. 둘 사이의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디가 없는 낯선 자유보다는 허전함이 컸던 아빠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제주로 왔다.
아빠의 등장은 하이디에게뿐만 아니라 내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뚜벅이 생활을 잠시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공항 주차장에 고이 모셔둔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아빠. 그 차는 내게 자유로운 이동 동선과 편안함을 허락했다. 몸만 편해졌을까. 혼자 결정하지 않아도 되고, 혼자 애쓰지 않아도 되는 내 편이 바로 내 곁에 있음은 마음의 긴장을 풀게 한다.
오늘 드디어 내게 남은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새별오름을 올린 인스타에 남겨진 댓글 하나, 하이디의 책을 보관하고 있다는 푸드트럭 총각이었다. 며칠 전 새별오름을 갔을 때 놓고 온 모양이다. 내가 누군지도 몰랐을 텐데 해시태그를 타고 찾았을 그 마음이 고마웠다. 물론 책을 잃어버리고 속상해했던 하이디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새별오름으로 가고 싶은데 뚜벅이 엄마는 고민을 한다. 책 한 권을 위해 택시를 타야 하나, 버스에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하나, 책만 찾고 돌아와야 하나, 아까운 시간 다시 새별오름에 올라야 하나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럴 때 구세주는 아빠. 아빠는 너무도 쉽게 우리를 새별오름에 데려다주었다.
우리에게 너무 좋았던 새별오름을 아빠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모기에 물려 발이 퉁퉁 부은 하이디가 다시 오르기는 무리인 것 같아 아빠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했다. 하이디는 아빠의 트렁크 위에 나는 그 아래 캠핑 의자를 놓고 자리를 잡았다. 나 역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자 하이디에게는 핸드폰을 주었다. 하이디 역시 음악 선곡의 자유를 가졌다.
올라갈 땐 오르는 것에 내려올 땐 내려오는 발걸음에 집중했던 새별오름을 마냥 바라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남편의 모습을 두 눈으로 찾는다. 빨간 티를 입어 쉽게 눈에 들어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크게 팔을 흔드니 남편도 팔을 흔든다. 먼 거리에서도 마음이 통했다. 멀리에서도 서로를 찾는 마음과 떨어져 있는 공간을 상쾌한 바람이 채워주는 느낌이 참 좋다.
남편을 눈으로 좇다가 바로 앞에 있는 푸드트럭을 본다. 브라질 요리를 파는 두 청춘이 보인다. 검은 티셔츠와 검은 모자를 맞춰 쓴 모습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펜과 수첩을 꺼내 쓱쓱 그림을 그려본다. 마음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답답함에 조금만 더 그림을 잘 그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인생에 여유를 더하는 또 하나의 재주가 그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 트럭 안에서 분주한 손놀림을 보여주던 한 청춘이 트럭에서 내린다. 재료 배달을 온 또 다른 청춘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재료를 전해받고,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건네는 행위는 모두 트럭 안에서 이뤄졌는데 인사는 트럭 밖에서 한다. 고마운 마음은 같은 땅에서 같은 높이에서 오고 간다. 당연하지만 귀한 사실이 느긋한 여유와 함께 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고 했다. 제주한달 동안 아니 제주에 열 번을 오면서 제주말은 보기만 했었다. 겁 많은 엄마 때문이었다. 오늘은 아빠가 있다. 아빠와 함께 승마장으로 향한다. 내가 애써 용기 내거나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아빠가 하이디와 함께 말에 오른다. 처음에는 긴장을 하며 몸을 움츠리던 하이디는 막상 말 위에 오르니 활짝 웃는다.
강아지가 곁으로 다가만 와도 내 뒤로 숨던 엄마 닮은 겁쟁이 딸이 엄마를 넘어선다. 엄마는 선뜻 용기 내지 못하는 승마에 성공하고, 또 타고 싶다고 한다. 다행이다. 엄마보다 더 많은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서. 이래서 아이는 같이 키워야 한다. 엄마의 부족한 부분을 아빠가 채워주며, 아이는 더 넓은 경험을 누리게 된다.
피곤을 견디며 주말마다 제주로 퇴근해준 아빠 덕분에 우리의 제주한달은 더욱 풍요로울 수 있었다. 엄마의 시선에 아빠의 시선을 더할 수 있었고, 엄마 손만 잡고 다니던 길에 아빠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늘 조심조심 종종 걷던 엄마 발걸음에 성큼성큼 아빠 발걸음의 리듬을 느끼고, 안전 영역을 잘 벗어나지 않는 엄마의 소심함에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아빠의 대범함을 얹었다. 그래, 함께해서 더 좋은 제주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아빠가 오면 자연스레 하이디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제주한달의 하이디 그림일기는 이제 안녕~
<뚜벅이 이동 경로>
오늘은 주말아빠덕분에 뚜벅이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