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은 다 기억력 저하를 걱정하십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인지능력이 온전하셨던 친할머니도 항상 기억을 못 한다고 걱정하셨습니다.
“내가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예전에는 기억을 참 잘했거든. 근데 이제는 돌아서면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사람 이름도 모르겠고.”
지금보다 더 젊었던 저는 ‘할머니’라고 꽥 소리를 지르고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를 해드렸습니다.
“전 지금 삼십 대인데도 사람 이름 기억 안 나요. 원래 기억력은 점점 나빠지죠, 할머니 이제 아흔이시잖아요.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죠. 하나도 상관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면 할머니도 즐겁게 웃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엄마의 경우에는 어떤 때 조금 전에 식사를 했는지 잘 모를 정도로 기억을 못 하십니다. 늘 걱정하는 엄마께 제가 기억력이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엄마, 기억은 못 해도 돼요. 기억 못 해도 일상생활 하는데 의외로 큰 지장이 없어. 중요한 건 엄마랑 나랑 둘이 잘 사는 거잖아. 엄마가 내 말을 잘 따라주는 거, 건강한 생활 하는 거, 즐거운 마음을 갖는 거, 이런 게 훨씬 더 중요하지 뭐 하나 기억을 하고 못하고 그런 게 제일 중요한 건 아니지. 엄마가 약 먹는 걸 항상 까먹잖아.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약 드시라고 했을 때 바로 먹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야.”
엄마는 저에게 ‘너는 참 담대하다’라고 하시는데, 담대하다기보다 일상을 영위하는데 중요하게 여기는 우선순위가 다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그보다는 걱정을 많이 한다고 해서 기억력이 좋아질 수는 없지만, 노력하면 습관을 만들 수 있고 서로 편안한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좋아질 수 있는 쪽으로 노력하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을 해서입니다.
저는 엄마에게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제 말을 따라달라고 얘기했습니다.
“엄마, 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와요. 그러니까 내 말을 무조건 따라주면 돼.”
“얘, 그런데 내가 평생 살았던 방식이 있잖아. 근데 그걸 어떻게 바꾸니. 그리고 네가 다 맞는 게 아니잖아.”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누군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그게 나여야지 우리 둘이 오래 같이 살 수 있잖아. 유아교육에서도 마찬가지 아냐? 애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지만 그 생각을 무조건 따라줄 수가 없고 때때로 강한 지시가 있어야 하잖아. 엄마가 혼자 살 수 있으면 모르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엄마가 결정한 일에 내가 뒤치다꺼리를 할 수는 없어. 내 말을 듣기 싫을 때 ‘둘째 딸 말을 잘 듣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해.”
엄마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어넘기십니다. 엄마께서 오래 유아교육을 하셨고, 신앙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입니다. 엄마가 관계에 따른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만 할 수 없다는 겸손함이 마음 안에 없었다면 같은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요. 오래 기관장을 하면서 스며든 보스의 생활 방식과 고집 때문에 제가 힘들었던 것도 많지만 몇 년 잔소리하면 천천히 변화하는 엄마께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제가 경도인지장애였던 엄마와 함께 살면서 신경 썼던 것은 건강한 생활과 우리 둘 사이의 관계 설정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곧 다시 외국에 나갈 거로 생각했는데, 제 친구들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준비 단계 같은 거지. 단 음식은 집에 놓아두지 않고 좋은 단백질과 충분한 야채를 드실 수 있도록 장을 봐. 엄마께서는 장을 볼 때 가격을 주로 보시잖아. 세일하는 디저트를 유기농 야채보다 좋아하셔. 엄마께 야채는 공짜라고 생각하고 육류나 단 음식은 가격이 열 배라고 생각하고 장을 보면 좋을 거 같다고 말씀드렸어. 엄마가 당뇨가 있으시니 간이 세지 않은 두부 요리 같은 것도 한 끼 식사가 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처음에는 항상 밥을 찾으시더니 천천히 바뀌시더라고. 엄마께서 뭔가 해야 하는 일에 열심이셔서 아쿠아로빅을 끊어드렸어. 시간 맞춰서 가시는 건 잘 하시니까. 다른 어르신들을 보니 나이가 들수록 습관이 된 일만 부담 없이 하더라고."
착한 자식일수록 부모님께 잔소리하고 부모님 뜻에 어긋나는 일을 매우 어려워하는 것을 봅니다. 제가 제어하려는 성향이 높아서이기도 하지만 멀리보고 모두를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양갱을 매일 드리는 일이 효도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