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소개해 주세요.

day-17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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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가 넘어 눈을 뜬다. 씻고 거실로 나와 노트북이 있는 테이블에 앉는다. 팀 단톡 방에 출근이요, 말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한두 달 전이었다면 이 시간에 사무실에 앉아있었겠지. 아침 루틴으로 자리 잡은 화장품을 순서대로 바르고, 이틀 연속 같은 옷을 입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차키를 챙겨 나섰을 것이다. 집안에서 출근할 때는 조금 다르다. 앞머리만 빨리 말리고, 대충 묶는다. 화장도 여러 단계 생략된다. 눈가에 펄이 칠해졌는지 아닌지는 화상 미팅에선 보이지 않는다. 아이라인만 잘 그려주면 그만이다. 멀쩡한 티셔츠를 골라 입고 바지는 고무줄 바지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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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근무는 고무줄 바지 같다. 어딘가 모르게 헐렁한 기분이 든다. 매일 아침 팀원들과 업무 공유를 한다. 왁자지껄 이야기하고 종료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뿅 하고 찾아오는 고요. 다시 혼자가 되어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오늘 할 일들을 하나씩 처리한다. 혼자서 일하면 초를 끄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해결했을 때 조용히 빛이 소멸하는 기분. 반대로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벽돌을 하나씩 부수는 기분이었다. 부시는 타격감도 있고, 일이 끝나면 그 끝을 같이 구경해 줄 동료들도 있었다. 이번엔 잘게 잘 부서졌네, 하고 묻지 않아도 의견도 들을 수 있고. 오래된 일도 아닌데 그때가 그립다. 바뀐 환경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는 건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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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달아 화상 미팅을 하게 되면 미래에 와있다는 생각이 든다. 버튼만 누르면 여기저기 있는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미팅이 끝나면 다음 미팅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나는 또 전혀 다른 사람들과 모여 대화를 나누게 된다. 물리적으로는 모두 각자의 집이지만 우리는 어느 한 곳에 있었다. 우리가 모인 곳은 어디일까. 나는 한자리에 앉아서 여러 곳을 뿅뿅 옮겨 다니고 있다. 초등학교 때 상상해본 미래 세상이 이런 모습은 아니였을까. 물론 그 미래 세상에서 트로트가 유행하고 있고, 백신 없는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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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디지털 세상 좌표를 헤매다 보면 해가 진다. 창가에 앉아 있어서 해 지는 시간이 빨라졌다는 걸 좀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 집안에서 봄을 다보내고 여름에 출근을 해서 봄옷을 아예 꺼내지도 않았는데, 가을 옷도 안 꺼내고 겨울옷 입게 생겼다. 캄캄해지는데도 남편이 밥을 하러 나오지 않으면 내가 밥을 안친다. 압력솥이 칙칙폭폭 소리를 내면 남편이 나와서 밥 불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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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면 자유시간이다. 최근에는 드라마 <비밀의 숲>을 정주행 하는데 저녁시간을 많이 썼다. 보통은 웹툰을 보거나 책을 보고 글도 쓴다. 오늘 저녁에는 추석 연휴에 뭘 좀 하면서 시간을 보낼지 찾아볼 생각이다. 올해는 휴가를 거의 내지 않았다. 집안에서만 일했는데도 마음이 참 바빴던 느낌이다. 고생한 나에게 근사한 선물을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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