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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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 봐도 배우고 싶은 악기가 당최 떠오르질 않는다. 왜일까? 나는 악기가 재미가 없었나? 돌이켜 보면 재미없어서 그만둔 악기들도 몇 가지가 있었다. 어린 시절 배웠던 피아노는 한 손으로 네모, 한 손으로 세모를 동시에 그리는 곡예 같은 것이었다. 양손 치기가 시작될 무렵 멘붕을 느꼈다. 이십 대에 배워본 기타도 그냥 근처에 굴러다니는 기타가 있어서 코드만 좀 짚어 보았을 뿐, 노래 한 곡을 쳐본 뒤 금방 흥미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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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 배운 악기는 바이올린이다. 열 살에 시작해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배웠으니 6년 정도를 켰다. 그 뒤로 근 십 년 동안 연주해본 적이 없지만, 지금 바이올린을 다시 쥐어도 켤 수는 있을 것 같다. 잠깐 배운 것과 오래 배운 것의 차이는 그런 것 같다. 일 년 남짓 배운 드럼은 다시 드럼 세트에 앉으면 칠 수 있을지 장담을 못하겠다. 그래도 바이올린은 다시 켤 수 있지, 하는 느낌. 머리보다 손가락이 기억해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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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악기를 배운다면 그건 아마 악기가 아니라, 프로그램이지 않을까. 소리를 만들어 쌓고 연결해서 곡을 만드는 작업이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친구가 같이 작곡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해서 하겠다고 했었는데, 주도했던 친구가 바빠지는 바람에 시작도 못했다. 작곡을 배워서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도 올해처럼 집콕의 해가 될 테니 이번에야 말로 배워볼 좋은 찬스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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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질문이 어떤 악기를 배울래, 가 아니라 어떤 악기를 친구로 맞이할래, 인 점이 눈에 띈다. 친구라. 악기와 친구를 한다면 콘트라베이스나 첼로 같은 체구가 나와 비슷한 쪽이 좋을 것 같다. 그런 친구들은 몸만 커다란 것이 아니라 그만큼 무겁고 낮은 소리를 낸다. 바이올린을 배울 때 비올라나 첼로가 내는 육중한 소리가 부러울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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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 있는 악기들은 기타고 바이올린이고 다 똑같은 게, 처음 배울 때 손가락 끝이 아프다. 어릴 때는 항상 켜고 있어서 몰랐는데, 오래 안 켜다가 켜보면 줄을 짚은 손가락 끝이 아픈 걸 알게 된다. 그 자리가 굳은살이 되고, 그 굳은살이 손가락 속으로 숨어서 없어질 때쯤이 되면 악기도 몸에 맞는 듯 편안해지고 실력도 생긴다. 몸으로 하는 일들은 다 그렇게 인이 배겨야, 조금씩 잘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요즘에는 뭔가를 그렇게 인이 배길 정도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잘 안 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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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뭔가를 하고 싶었다는 건 잘 기억해두는 게 좋다. 새로운 것을 배울 에너지는 가끔 알 수 없는 타이밍에 샘솟곤 하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하고 싶은 마음을 잘 쟁여두는 것이 좋다. 보통 이런 마음은 오래 묵히면 좋은 에너지 원이 된다. 첼로와 작곡도 마음속 항아리에 잘 담아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