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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ie Jan 18. 2021

조용히 불안한 날

오랜 재택근무와 사회적 단절로 저녁 시간이 많아졌다. 밥을 지어먹고, 뉴스를 보면서 맨손운동을 한다. 그러고 나서 소파에서 이런저런 앱을 뒤적거리면서 생각한다. 나 이렇게 허송세월 보내도 괜찮은 걸까.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 손가락은 웹툰 앱을 향한다. 평소 보던 웹툰은 다 봤다. 새 만화를 시작해볼까 해서 켜보면 셋 중 하나다. 공주가 드레스 입고 나오거나, 교복 입은 애들이 싸우고 있거나, 인간이 아닌 것들이 싸우고 있거나.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링크드인이나 커리어리 같은 앱을 켜서 일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있나 본다. 그런 걸 보고 있노라면 나는 왜 그런 콘텐츠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어 있는 걸까, 아쉬운 마음이 든다. 삼십 대 중반, 어떤 사람들은 그 나이에 자기 이름 석자를 사회에 버젓하게 전시하기도 하던데, 나는 왜 별 볼 일이 없지, 그런 생각이 스친다. 나에게도 나만의 이야기가 있으니 그런 것을 적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을 고쳐먹고 브런치에 일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했지만 몇 문단 적지 못하고 노트북을 덮어야 했다. 


중학교 때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두 애쵸티 팬이라서 나도 애쵸티를 좋아하는 척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랑 잡지를 사서 최애 멤버의 사진을 나눠갖기도 하고, 앨범도 사서 노래도 많이 들었다. 친구들은 애쵸티 멤버의 생일이면 박하사탕을 다섯 개씩 포장해서 전교생에게 돌리곤 했는데, 나도 친구들과 그 사탕 포장을 같이 했다. 사실 나는 그렇게까지 그 연예인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친구들이랑 지내는 시간은 재밌었지만 내내 애쵸티의 팬 흉내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은근한 죄책감을 갖게 만들었다.


억지로 일에 대해 뭔가를 쓸 때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남들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인 '척'을 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우기 어렵다. 사실 뭔가 더 아는 것이 있기도 할 텐데, 구체적인 이야기를 쓰면 회사에 해를 끼칠까 봐 뭐든 뭉뚱그려 써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는 척과 추상적 설명이 범벅이 되어 더 이상 써나갈 수가 없어졌다. 마음에 안 드는 글은 일찍 때려치우는 게 좋다. 


웹툰도 재미없고, 글도 안 써지고 그저 죄 없는 나의 현재의 모습을 깎아내리는데 시간을 쓰는 것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몇 지인들에게는 코로나 블루를 호소하기도 했다. 하루에 두 번쯤 열심히 해서 뭘 하나, 다 부질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 나서 저녁나절이면 왜 나는 사회적으로 더 성공하지 못했나 하며 자책하다니. 정말 대책 없는 생각의 흐름이다. 


모순이 넘치는 생각의 미로에서 불안을 본다. 어릴 때도 잘 덤벙거렸던 나는 현관문 열쇠를 종종 잃어버리곤 했다. 맞벌이 가정에 제일 일찍 집에 오는 사람은 나였다. 그래서 내가 키를 들고 다니는 건데 잃어버렸으니, 집에 못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나는 현관에서 벨을 눌렀다. 벨을 누르고 누르고 또 눌렀다. 집에 들어가고 싶어서 문을 두드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울면서 현관문을 발로 쾅쾅 차다가 유리를 깨 먹었다. 집에 아무도 없고 열쇠도 없으면 누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 될 일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결국 혼자 진을 빼다 문까지 부수게 만든 그것의 이름이 바로 불안이다.


불안을 동력으로 뭔가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차분하게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숨을 고르고 나를 바라봐주자. 아무도 없는 집 앞에서 문을 부수는 행동을 내가 지금 또 하고 있지는 않은가? 불안이 사라지고 나서 보면 집 앞에 앉아 있거나 친구네 놀러라도 가면 될 걸,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해결책을 두고도 내가 그저 울면서 진을 빼고 있지는 않은가. 


그걸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 자주 상기해보는 요즘이다. 나에게 있는 현재의 행복과 내가 가진 강점과 기회들. 그것들 위에서 내가 해야 할 행동. 그런 걸 다시 떠올려 보니 조금 기분이 좋아진다. 어려운 지점을 만났을 때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라 기분이 좋아진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어려움이 사실은 나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닐까. 그리고 그 일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 기회가 아닐까. 다시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일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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