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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ie May 26. 2023

첫 측정, 100개의 문항과 공개범위

조직 건강성 측정 이야기(2)

사람의 건강을 검진하는 체계는 이미 잘 잡혀있다. 가장 간소한 검사라고 한다면 키와 몸무게를 재고, 피와 소변을 채취해서 검사할 것이다. 측정을 통해 나온 숫자들은 정확한 기준을 통해서 정상인지 아닌지가 판단된다. 조직 건강성 측정을 만든다면 어떨까?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가?

처음 시작할 때 중요하게 다룬 부분은 이 주제였다. 일단은 구성원들과 함께 무엇을 측정하면 좋을지 조직에서 관찰되는 좋은 행동과 좋지 않은 행동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열명이 넘는 대인원이 토론하기가 어려워서 서너 명으로 된 그룹으로 나눠서 토의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들을 종합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재밌는 에피소드도 하나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나의 리더였는데, 그는 심리학 전공자로 이런 측정을 만드는데 전문성이 높았다. 그래서 구성원 의견을 종합한 다음, 나름의 기준을 갖고 방향 정리를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전달받은 구성원들은 인사에서 답정너를 시전 한다고 느꼈다. 일주일에 한 번 점심시간을 내서 참석하는 구성원들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키면 안 되겠기에 혼자 정리한 마음도 있었을 텐데, 아무튼 미팅에 참석한 구성원들은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날 점심미팅이 끝나고 한 분이 우리를 남겼다. 그분은 내 리더를 앉혀놓고 이렇게 하면 왜 안되는지 차근히 설명하셨는데 우리끼리는 우스갯소리로 나머지 공부를 당했다, 혹은 혼났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게 혼나기도 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6개월이면 될 줄 알았던 건강성 프로젝트는 사전 준비만 거의 1년이 걸렸다. 우리는 1차 조직 건강성 측정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측정하기로 했다. 추리고 추렸는데도 변수가 거의 20개 정도 됐던 것 같다. 질문 수는 간신히 100개로 맞췄다. 응답하는데 약 8분 정도 걸리는 상당히 긴 설문조사였다.


측정된 결과가 어느 정도 숫자여야 좋은가?

문항은 5점 척도로 측정했다. 1점은 '매우 그렇지 않다'이고 5점은 '매우 그렇다'라는 의미다. 모든 문항은 1~2점 부정응답, 3점 중립응답, 4~5점 긍정응답으로 처리해서 퍼센트로 표시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비율이 어떻게 나오면 정상이고 어느 정도부터 이상치인지 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정응답이 50%가 나왔다면 심각한 문제일까? 혹은 긍정 부정 모두 지극히 적고 중립 응답만 90%가 나오면 어떨까? 그게 괜찮은 게 맞는 걸까? 아무도 이 문제에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중단되고 난 다음날 '주요 의사결정의 과정이 적절하게 공유된다'라는 질문을 한다면 긍정응답이 높게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즉 맥락에 따라서 부정응답이 많더라도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건강성 측정의 결과를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중앙의 인사팀이 아니라 현업의 구성원들이라는데 모두 공감했다. 그래서 초기 프로젝트 팀은 이 측정의 결과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전부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응답 인원이 4명 이상이라면 제일 작은 단위조직까지 모든 조직별로 결과 리포트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경영진에게 보고하자 바로 물음표가 날아왔다. 그렇다면 사실상 모든 조직의 성적표가 전사에 공개되는 것이 아닌가? 결과는 점수로 보여주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지 않은 조직의 리포트가 불명예스럽게 회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공개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첫 해에는 전사 리포트만 모두에게 공유하고, 두 번째 해에는 본부 정도 단위의 리포트를 공개하고 세 번째 해에는 모든 단위 조직의 리포트를 공개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서 '조직의 리더가 잘하고 있는지'를 특정해서 묻는 질문을 제외했다. 특정인이 잘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CEO와 경영진으로 한정했다. 조직 리더가 잘하고 있는지는 단지 조직에 리더십이 동작하고 있는지만 물어도 충분했다. 조직 내에 조직의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는지, 지속적으로 격려하고 동기부여하는 사람이 있는지, 이렇게 물으면 충분하다는 걸 경험을 통해서 알았다. 조직 내에 조직장은 한 명이지만 리더는 여럿일 수 있다. 조직장이 못해도 이런 역할을 잘하는 시니어가 있으면 리더십은 보완된다. 또 이런 질문에 대한 부정응답이 높으면 리더들은 본인이 해야 하는 영역으로 인식했다. 건강성 측정 리포트가 누군가의 성적표가 아니라 팀이 모두 함께 노력해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지표이기를 바랐다.



조직 건강성 측정을 만든 프로젝트 팀은 이제 동료를 넘어 나의 친구들로 남았다. 건강성 측정을 만든 지 6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지금도 연락하고 가끔 술자리를 만든다. 다 같이 모이면 절반이상이 이직이나 퇴사한 상태인데도 좋은 회사나 조직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같은 신념을 공유했었던 것 같다. 나머지 공부를 시킨 분과 내 리더는 동갑내기인데 지금은 나란히 휴가를 내고 밖에서 만나서 노는 절친이 되었다. 일을 통해서 사람을 얻는 것이 참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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