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

day-24

by Lucie

1

짧은 휴가로 나흘간 집을 비웠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나흘간 고인 공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무도 쓰지 않은 공간인데 머리 긴 귀신이라도 쓸고 갔는지 바닥에 머리카락이 나뒹군다. 하지만 자정이었다. 캐리어를 열어 대충 짐을 풀었다. 돌아오는 비행기가 9시에 한국 도착이라 괜찮은 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세 시간 비행기 타고 내려서 집에 도착하기까지 다시 세 시간이라니. 뭔가 불합리한 느낌이었다.


2

무리한 휴가 덕에 출근하자마자 일이 많았다. 또 자정에 들어왔다. 들어온 방에는 화장실부터 안방까지 더 많은 머리카락이 뒹굴고 있었다. 오늘은 꼭 집에 와서 청소기를 돌리리라. 꿉꿉한 마음을 억눌렀다. 화장실 바닥에도 머리카락 뭉치들이 힘을 합쳐 존재감을 과시했다. 오늘은 꼭 화장실 청소도 하리라. 거실에는 여전히 캐리어 두 개가 입을 열고 옷들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오늘 저녁엔 꼭 캐리어도 정리하리라.


3

밥을 먹기 전에 빨래를 돌렸다. 밥을 먹고 나서는 널려있던 빨래를 걷었다. 걷은 빨래를 소파 위에 쌓아 놓고 청소기를 돌렸다. 그다음엔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화장실 청소는 신기한 게, 청소하다 보면 계속 청소할 것이 보인다. 타일 사이에 낀 오래된 물 때가 색을 뽐내기 시작했다. 세제를 뿌리고 수세미로 문질렀지만 이전과 차이가 없었다. 역시 락스를 사야겠군.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걸레를 빨 때쯤 허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화장실 청소는 허리가 아프기 전에 빨리 끝내야 한다. 매직 스펀지로 타일 사이도 닦고 싶지만, 이미 욕심인 걸 알고 있다. 화장실에 걸레와 고무장갑을 널어 두고 나와서 빨래를 갰다. 빨래를 다 갤 무렵 세탁기가 일을 마쳤다. 나는 다시 빈 건조대에 빨래를 널었다. 개 놓은 빨래를 서랍에 넣으면서 캐리어 정리도 했다.


4

사놓은 생수가 한 병 남았다. 화장실에 휴지를 바꿔 끼우는데 휴지도 두 롤밖에 남지 않았다. 양파도 한 망을 다 먹고 사분의 일 조각이 남았다. 감자는 한 알 남았다. 두 봉지나 사다 놓은 베이글도 모두 떨어졌고, 크림치즈도 마지막 통이다. 통조림 음식도 하나도 없다.


5

휴가 다녀오면 원래 물건도 다 떨어지고 청소할 것도 테러처럼 늘어나고 그러는 건가? 주말에 이마트나 갈까 싶었는데, 코스트코에 가야 할 각이다. 코스트코에 가서 락스를 사려고 하면 왠지 엄청난 대용량을 팔아제낄 것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락스는 냄새도 지독하고, 어쩐지 옛날 물건 같아서 별로 사고 싶지 않았다. 결혼하면 예쁜 병에 든 향기로운 세제만 사서 써야지 싶었는데. 그런 걸로는 물때와 싸워 이길 수 없다. 엄마 파워 장전하려면 어쩔 수 없는 구비 품목인 듯하다.


6

휴가도 끝났고, 일주일간 신경 많이 쓴 프로젝트도 일단락되었다. 하 이제 다시 일상이 찾아오는 거 같다. 때마침 금요일이다. 차가워진 날씨에 풀벌레가 고즈넉하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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