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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Nov 07. 2022

일상의 논어 <자한子罕7>-고양단叩兩端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오유지호재 무지야 유비부문어아 공공여야 아고기양단이갈언 


-공자가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이 있을까? 없다. 그저 비루한 사내라도 내게 물어 온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질문일지라도 나는 양극단을 두드려 가며 정성을 다하련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무지함을 알지만 저들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알지 못한다.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현명한 것이다." 공자와 소크라테스 둘 다 무지에 대한 자각이 곧 진정한 앎의 시작이라고 인식하고 있지요. <위정> 편 17장에서 공자는 자로에게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스스로 대단한 학자라고 자부하는 사람일지라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요. 비트겐슈타인이 충고한 대로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산파술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다면, 적어도 위 구절에 의거하여 공자는 고단술端術로 사람들의 알고 싶어 하는 마음에 부응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단은 곧 두 끝이니 양단을 두드린다는 표현은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의 폭과 방식에 한계를 두지 않음에 대한 은유입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물리학 수업 시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교사가 "이렇게 설명해도 모른다면 선생님도 방법이 없다. 알아서들 복습 잘해라. 시험에 꼭 나올 테니까"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면 학생들은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교사가 기존의 전통적인 설명 예들을 모두 버리고라도 '인터스텔라'나 '콘택트(조디 포스터 주연의 1997년도 작품)' 등과 같은 공상 과학 영화들 시청을 과제로 낸 후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함께 토론하며 학생들의 이해를 도모한다면 난해하기만 했던 어려운 이론이 어느새 쉽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두 유형의 교사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정성에 있지요. 위 구절에서 공자가 강조했던 것은 바로 가르치는 자의 책임 있는 자세이고 그것은 곧 가르침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알고자 질문하기를 멈춘다면 가르치는 자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되지요. 시청각 자료가 부족했던 시대였던 만큼 공자의 설명에는 더 많은 정성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인仁에 대해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관념적 설명을 지속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지요. 과거 사람들의 실 사례들을 끌고 와 A 예로 이해하지 못하면 Z 예도 드는 방법으로 상대가 납득하는 지점을 찾아 주어야 합니다. 다만 그 과정이 고되고 지겹기에 정성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기에 소위 고단술은 사람들의 뇌와 가슴을 동시에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자극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의 정성을 알아채기 마련입니다. 그 정성에 부응하고자 귀를 쫑긋 세우고 마음을 집중하여 가르치는 자가 기뻐하는 순간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법입니다. 


다만 이 방법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자, 알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에겐 무용합니다. 학생이, 연인이, 공무원이, 자신의 앎의 대상에 무관심하다면 교육과 사랑과 행정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겠지요. 그래서 인연이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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