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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Nov 25. 2022

일상의 논어 <자한子罕22>-후생가외後生可畏

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자왈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


-공자가 말했다. "젊은 사람들은 두려워할 만하다. 어떻게 장래의 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못할 것이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사오십이 되어도 들리는 것이 없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제 책 <<담백한 주역 1>>에서 본 구절에 대해 해설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대로 인용한 후 간략히 첨언하도록 하겠습니다. 


- 논어 9편 <자한> 편에서 공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 / 젊은 사람들은 두려워할 만하다. 어떻게 장래의 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못할 것이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사오십이 되어도 들리는 것이 없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무슨 뜻일까요? 


20대 초반에 이미 세계적인 거물 CEO가 된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대의 트렌드 상 앞으로도 젊은이들의 이른 성공 사례는 많이 쏟아져 나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창의성과 창의성을 실체화할 수 있는 IT 기술 능력에서 기성세대는 가면 갈수록 젊은이들의 상대가 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나이와 경험이 더 이상 사회적 성공의 주된 요인이 되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큰 조직일수록 여전히 상명하복의 위계 질서가 강력하게 살아 있어 사회 초년생들의 숨통을 조입니다.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자리잡을 때 우리도 나이와 직급 같은 서열이 개인과 조직의 창의성을 질식시키는 폐단을 끊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젊음이 벼슬인 걸까요? 어디를 가나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청년'이라는 단어를 앞에 건 사업체들이 눈에 띕니다. 젊음 고유의 속성인 패기, 의식이 고착화된 기성세대와는 다른 도전정신, 싱싱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 등을 함축한 긍정적 속성의 단어이기 때문에 너도나도 사용하는 것일 테지요. 하지만 청년들은 알아야 합니다. 젊음은 한때이며, 세상이 소비하기에 좋은 '젊은 성공' 사례는 실상 극히 드물다는 것, 생각보다 금방 나이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공자야 학문 분야로 후생을 압축했을 것이기에 장래가 촉망되었던 후학이 나이가 들어서도 특별한 학문적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만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거나 재능이 모자랐음을 반증하는 것이므로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오십과 평균 수명 백세를 논하는 현 시대의 그것은 차이가 큽니다. 소수만이 교육을 받고 학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그 시절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는 지금은 차원이 다릅니다. 굳이 사무엘 울만의 '청춘' 개념을 인용하지 않아도 더 이상 나이는 젊음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오십 중년은 여전히 젊은 몸과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사오십에도 세상이 알아주는 성취를 이루지 못하거나 이름을 내지 못한 사람을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인식해도 좋은 근거로 저 구절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두려움의 존재인 지금의 청년들도 곧 남다를 것 없는 사오십에 이를 수 있음을 염두에 두는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젊은 시절에 자신을 알리기 위해 무리하게 기획하고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도록 삼가야 합니다. 억지로, 무리해서 무엇인가를 시도하다보면 일종의 '뻥튀기'가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유명세 이면에 이익에 대한 도모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면 나의 본질과는 다른 이상한 존재가 사람들 앞에 나와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이익을 맞바꾸면 삶 전체가 뒤틀리는 불행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사오십이 아니라 육칠십에 드러나도 좋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긴 호흡으로 살아야 합니다. 항룡유회가 들려주는 전성기의 의미를 <소상전>의 '천덕불가위수야'에서 다시 한번 되새기면 좋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비가 오고 눈이 내리 듯 덕을 쌓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이야말로 하늘이 바라는 방식일 것입니다. - (오종호, 『담백한 주역1』, 갑탁(2022), p33-35.) 


논어의 시작인 <학이> 편 1장에서 공자는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답지 않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공자의 본심은 이것입니다. 허명虛名을 좇는 대신 혹시라도 자연스럽게 이름이 나게 될 때 '명불허전' 소리를 들을 정도의 실력을 닦는데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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