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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Nov 24. 2022

일상의 논어 <자한子罕21>-묘수실苗秀實


子曰 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

자왈 묘이불수자유의부 수이불실자유의부


-공자가 말했다. "싹을 틔우고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꽃을 피우고도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者를 '것'보다는 '사람'으로 풀이하는 것이 좋습니다. 묘, 수, 실을 사람에 비유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구절은 중의적 해석의 여지가 충분합니다. 학문적 성취, 세속적 성공, 그리고 인생에 대한 복합적 메타포로 읽을  있는 것입니다. 특별할  없는 일상적 표현으로 이루어진 문장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공명하는 인간적 감정을 느낄  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생각에 생각을 더하여 온갖 개념을 창조하면서 연구해 왔지만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의 실체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규명되지 않는 것을 붙잡고 '생각 놀이'하는 것의 덧없음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형이상학적 거시 주제들보다 현실을 구성하는 미시 영역들의 독해에 주력하는 것이 현대 서양 철학의 흐름입니다. 공정, 정의, 자유, 이데올로기 등이 그 예이지요.


그렇다고 거시 주제들에 대한 사유가 무가치해진 것은 아닙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그것들은 다만 '말할 수 없는 것'일 뿐이지요. 그가 <<논리철학논고>>에 대해 "정말 중요한 부분은 쓰이지 않았다"고 말한 사실에서 우리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에 실은 정말 가치 있고 유의미한 내용들이 있음을 인정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데 집중했을 따름이지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의 모순이 집단적으로 발현되는 영역이 바로 종교입니다. 존재의 증명이 불가능한 '나의 신'에 대한 사람들의 절대적 믿음과 '다른 신'을 섬기는 여타 종교들에 대한 배타성은 관용의 정신을 상실시키는 종교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지요. 우리나라는 그 한계의 절정의 장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일까요. '생존하고 싶다'는 절규로 들리는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언론은 '불법행위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단호히 대응' 운운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정부 사람들에게 법은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아 행정을 맡은 사람들이 어떻게 국민을 대상으로 무관용을 원칙 삼을 수 있는 것인지 저는 아둔하여 알지 못하겠습니다. 국민을 생각하는 관료라면, 사람으로 태어나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을 꾸며 먹고 살기 위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관용의 원칙' 하에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최선의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니체가 신을 죽이고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외쳤어도 신은 부활했고 인간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바다'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더러운 강물'에 머물고 있으며, 말할 수 없는 신의 자리는 말할 수 있는 돈으로 채워진 지 오래입니다.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철학의 절벽'과도 같습니다.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과감히 허공으로 도약한 철학도 고개 숙이며 뒤돌아선 철학도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극복을 시도하는 인간들에게 실패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적 성공만을 실패의 대칭 개념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로 인해 인간의 실패가 지속될 뿐이지요.


인간은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일상의 논어를 통해 공자와 여러분을 잇는 저도 작은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시몬에게 건넨 '깊은 곳으로 가라'는 예수의 말은 시몬을 베드로로 거듭나게 했지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그물을 던진다고 모두 고기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깊은 지점으로 나아가 그물을 던지는 시도인 것이지요.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해도 우리의 삶은 시도로써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시도가 곧 다리입니다. 우리는 시도해야 합니다.   


철학의 절벽에서 저는 구름다리 놓는 일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명리학과 주역 연구를 통해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의 실체를 조금은 엿보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빛나는 시도는 사랑입니다. 피지 못한 꽃과 맺지 못한 열매에 대한 연민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떠나간 안회의 삶에 대한 연민이 공자에게 사랑이듯이 지나간 우리의 인연도 모두 사랑입니다. 안회에 대한 연민으로 공자가 새로운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우리의 사랑도 새롭게 시도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질식되고 있는 시대에 사랑을 질식시키고 있는 자들을 몰아내고 우리는 다시 사랑이 흐르는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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