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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Nov 26. 2022

일상의 논어 <자한子罕23>-말여지하末如之何


子曰 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何也已矣

자왈 법어지언 능무종호 개지위귀 손여지언 능무열호 역지위귀 열이불역 종이불개 오말여지하야이의


-공자가 말했다. "깨우치기 위해 하는 말이라면 따르지 않을 수 없겠지? 고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부드럽게 이르는 말이라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없겠지? 찾아내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기뻐하기만 하고 찾아내지 않으며 따르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법어法語'는 일반적으로 부처의 말을 가리킵니다. 이 점을 참고하면 '법어지언'은 타인을 깨닫게 하기 위한 가르침의 말 정도가 됩니다. 


능能은 '능히/응당 할 수 있다'의 뜻이니 '능무能無'는 '능히/응당 할 수 없다'의 의미가 되고 뒤에 호乎가 붙었으니 문맥에 맞게 위와 같이 해석하면 됩니다.   


공자가 제자들이나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고쳤으면 하고 무게 있는 내용의 말을 건네면 듣는 자들은 따르는 흉내라도 내지 않을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개선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손巽은 '부드럽다', '공순하다'의 뜻이고 <<주역>>의 57괘 중풍손괘重風巽卦에 '공손함'의 개념으로 쓰인 데서 '손여지언'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남의 귀에 거슬리지 않도록 최대한 온화하게 하는 말이지요. 칭찬의 내용으로 채우니 듣는 상대가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정 받았다고 마냥 기분 좋아할 일이 아니라고 공자는 말하는 것입니다. 역繹은 '끌어내다', '풀다'의 뜻이니 그 은근함 속에 숨어 있는 핵심을 파악하여 실천의 재료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공자가 '법어지언'과 '손여지언'을 구분해 사용한 것은 받아들이는 상대의 성격과 기질, 태도, 정신의 성숙도 등에 따라 말의 방식을 달리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릇에 맞춰 준 것이지요. 위 구절에 담긴 공자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상대의 그릇에 맞게 방식을 달리하여 말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이든 조언이든 제대로 수용하여 더 큰 그릇의 인물로 성장하는 동력으로 활용하는 이는 드물다는 것이지요. 


헤겔은 인간을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고 인생을 자기의식을 인정 받기 위한 '인정투쟁'의 장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계승하여 호네트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체제 속에서 발생하는 인정과 무시의 문제를 숙고했지요. 그에 따르면 인간은 사랑과 사회적 권리, 그리고 사회적 연대를 경험하면서 각각 자신감, 자존심, 그리고 자긍심이라는 긍정적 자기의식을 형성합니다. 이 세 가지 인정 형태가 갖춰진 사회에서 개인은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굳이 헤겔과 호네트를 끌어들인 것은 위 공자의 말에서 철학적 '인정' 개념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한 말에는 진지하게 듣는 척할 뿐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고, 치켜세우는 말에는 반색할 뿐 속내를 읽으려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인정 욕구는 유아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갈구이지요. 그것의 극단을 비공개 일정을 굳이 사진에 담아 공개하는 영부인에게서 봅니다. 사진 속의 그의 모습에서 긍정적인 느낌을 전달 받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공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누구로부터 무슨 말을 듣는 지가 뭐가 중요한가? 그대들 자신을 알아 고칠 점이 있으면 고쳐 더 좋은 사람으로 바뀌고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면 그뿐이다. 그대들 스스로 답을 구하라. 백날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고 강연을 들은 들 무슨 소용이랴. 그대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 답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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